기쁨과 아픔을 함께 하는 탈북민 모임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17.03.10
bakery_cafe-620.jpg 서울 도심의 베이커리 카페.
사진-연합뉴스 제공

3월하면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달을 의미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학생들은 봄방학을 마치고 새 학기 새 학년에 입학 하거든요. 어느새 꽁꽁 얼었던 땅도 녹았고 춥다고 움츠리고 다니던 사람들의 어깨도 하나둘 쑥쑥 펴지네요. 벌써 거리에는 여성들의 화사한 봄 옷차림이 한창입니다. 지난 주말은 언제 겨울이 지나 갔나 싶을 정도로 따스한 봄날 이었습니다.

탈북어머니회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 여느 때 없이 조금 일찍 서둘러 전철을 타고 목동으로 갔습니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점심 식사를 하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강서 자치구에서 취약계층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꾸려져 운영하는 커피숍이었는데 회령이 고향인 친구 인순이가 팀장이었습니다.

따스한 커피 잔을 앞에 놓고 한마디씩 합니다. 함북도의 회령, 무산, 청진, 함남도의 함흥과 황해도의 개성 그리고 평양, 태어나서 자란 고향은 서로 다르고 성격도 많이 달랐고 때로는 높고 낮은 언어 때문에 서로 다른 의견 상으로, 때로는 오해로 다투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부족한 것은 서로 채워주고 아픔도 기쁨도 함께 치유해 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저에게는 소중한 귀한 분들이기도 합니다.

‘탈북 어머니회’ 모임이라해 여자들만 또는 할머니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도 있습니다. 이번 모임은 특별한 일 없이 오랜만에 서로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점심 약속을 잡았거든요. 그동안의 있었던 재미있는 있었던 얘기 또는 슬픈 얘기든, 아팠던 일이든 한마디씩 하기로 했습니다. 고향이 회령인 제일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분은 이곳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 강제북송되어 아내 분은 하늘나라로 보냈고 딸은 정치범수용소로 갔고 두 아들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 한국으로 온지 15년이 되었거든요. 북한에서는 처단자 가족이라는 성분 때문에 군생활도 못했고 가고싶은 대학도 갈수가 없었다고 합니다만 70중반이 되었지만 재혼을 해 정말 행복한 삶을 산다고 첫말을 뗐습니다.

재혼한 아내 분은 두 아기 돌봄으로 일주일에 한 번 집으로 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외로움을 풀기 위해 무도장으로 춤을 배우려 다녔다고 하네요. 1년에 1000만원을 까먹었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1000만원이 너무도 아까웠다고 하네요. 지금은 노래방 기계를 구입해 집에다 차려놓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고 합니다.

아침 식사 후에는 3시간씩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마치고는 집안 청소를 깨끗이하고 노래방 기계를 틀어 놓고 홀로 노래부르고 춤을 춘다고 합니다. 처음 이곳 한국에 왔을 때에는 여기 저기 아픈 곳이 많았고 또 마음의 상처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만 지금은 아픔도 없어지고 활력소가 생겨 젊은 청춘으로 다시 돌아 왔다고 하네요.

듣고 보니 우리 회원들 중에 제일 멋진 인생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지난날 우리 부모님은 누구를 위해 살았고 도대체 누구를 배반했기에 처단되어 60평생을 처단자 가족으로 살아 왔는지 본인 스스로도 알 수 없고 이해가 안 된다고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들 며느리에게도 자주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하네요. 열심히 들어 주던 친구들은 부러운 마음으로 커피숍이 떠나갈 정도로 큰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한 친구는 지금 막 사춘기에 들어간 딸과 사이가 안좋은 얘기를 합니다. 한창 엄마의 품안에 매달려 응석부리며 자라야 할 6살 나이에 엄마 품에서 떨어져 갖은 고생 끝에 20살이 되어서야 엄마를 찾아 이곳 한국으로 온지 이제 5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해 자주 딸과 다툰다고 하며 눈에 눈물이 글썽합니다. 한참 듣던 저는 남의 일 같지가 않았고 마치 내 일처럼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내 사정과 꼭 같은 점이 많았거든요. 10대에 어린 나이에 가족과 헤어져 상상도 할 수 없는 상처로 인해 마음이 꽉 닫혔던 우리 아이들과 몇 년 만에 만나 처음에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울었지만도 시간이 갈수록 수 없이 다투었거든요. 하지만 자주 많은 대화를 통해 요구 조건을 들어 주면서도 반면에 엄마로서 뭔가를 요구하고 하나하나 함께 노력하는 과정에 조금씩 상처가 치유되어 마음의 문을 열어 가기 시작했거든요.

이미 자녀 문제로 이런 저런 경험과 교훈을 겪은 선배로서 눈물이 글썽이는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시간을 가지고 지켜봐 주는 것도 부모의 과제라고 경험담을 얘기 해주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많은 친구들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너무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만들어 가며 사는 우리 인생을 위해 커피잔을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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