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들에게 말 못할 비밀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14.06.05
leeseungbok_memorial-305.jpg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이승복기념관.
사진-연합뉴스 제공

얼마 전에 저는 탈북 어머니회 회원들과 함께한 동해 관광 중에 제일 잊히지 않는 곳이 있었습니다. 강원도 평창에 있는 이승복 기념관이었습니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맨 처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승복 동상이었습니다. 12살 어린소년의 동상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는 글발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승복 동상을 보는 순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는 어린 소년의 당차고 챙챙한 목소리가 메아리쳐 귓전에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어린 소년의 동상을 바라보는 순간 언젠가 방송국에서 근무하던 중 녹음을 편집하다 이승복에 대해서 들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1968년 12월 초 울진 삼척으로 쳐들어왔던 북한 무장 공비의 잔당에게 피살되었다던 그 소년, 그러나 총구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나라의 주인답게 ‘나는 공산당이 싫다’고 외쳤다던 어린 소년, 그 작은 몸에 어디 총구를 겨눌 곳이 있다고 북한 무장공비는 어린 가슴에 총을 겨누었을까, 듣던 그대로 그의 고향집을 찾은 제 마음은 더더욱 생각만 해도 마음이 쓰리고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당장에 그 어린 소년이 동상에서 살아나올 것 같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시 북한 군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도 다시 한 번 알게 됐습니다. 함께 가셨던 나이 많은 한 어르신은 고향에 두고 온 손자 녀석이 생각난다면서 고급 사탕 한 줌을 동상 앞에 놓아주기도 했고 함께 간 제 손녀는 학교에서 배워서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동상에서 조금 떨어진 뒤쪽에는 이곳 대한민국에서 현재로는 볼 수 없는 작은 오막살이 초가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승복’ 소년이 당시에 살았던 고향 집이었습니다. 문패에는 ‘이석우’라고 승복 소년의 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었고 부모님이 당시에 쓰시던 탈곡기와 지게, 단지, 단수(장롱)도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 있었습니다.

탈곡기는 북한에서 많이 보아오던 그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손녀에게 하나씩 탈곡기는 벼를 탈곡 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지게는 나무를 할 때와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닐 때에 사용하는 데 쓰이고 단수는 이불을 올려놓는 장롱 대신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나하나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었는데 제법 어른스럽게 머리를 끄덕끄덕 했답니다.

손녀를 보며 마치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 따라 김일성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던 만경대에서 찌그러진 물독을 보고 궁금해 부모님에게 묻던 생각이 떠올라 혼자 웃음을 짓기도 했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남한에 침투했던 북한 잠수함을 보았습니다. 동해 바닷가 주변도로로 달리던 택시기사가 신고를 해 나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우리의 관심을 더 끌었던 것은 잠수함 옆에 놓여있는 보잘 것 없는 한 척의 나무 어선이었습니다. 우리 회원들 중에 실제로 청진항에서 그 어선을 타고 2009년에 탈북해 이곳 한국에 입국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11명의 가족이 함께 타고 왔다고 합니다. 젊은 부부와 12살짜리 아들은 자기네 배라고 하면서 한달음에 달려가더니 정말 오고 싶었고 보고 싶었다고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우리 회원들은 마냥 함께 기뻐해 주었습니다.

배 위에서 함께 기념사진도 찍어 주었고 함께 기쁨의 눈물도 흘려주기도 했고 함께 만져보고 쓸어주기도 했습니다. 검푸른 파도가 치는 바닷물을 가로질러 죽기를 각오하고 온 가족이 이 작은 나무 쪽배를 타고 북한 성진 조선소에서 자유를 찾아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더더욱 강대하고 멋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새삼 우리 회원들 한 명, 한 명을 되새겨보니 정말 대단한 영웅들이었으며 모두 소중하고 귀중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누구 하나 쉬웠던 사람이 없으며 나름대로 상처와 아픈 마음을 가진 분들이라는 것을 더더욱 알게 됐습니다.

그때 손녀가 저에게 저 사람들은 북한에서 왜 왔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옆에 있던 한 친구가 네 할머니도 북한에서 왔다는 답을 해주자 갑자기 손녀의 얼굴 표정이 변해졌습니다. 아직은 이해하기 힘든 어린 손녀에게 저는 농담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되면 얘기해줄 것이라고는 했지만 이곳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란 손자들에게까지도 비밀을 가지고 있어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짠하고 이런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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