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추석, 서울의 추석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14.09.18
limjingak_joint_table-305.jpg 추석인 8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실향민 가족들이 망배단에 절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 제일 먼저 다가오는 명절이 추석입니다. 추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절의 하나로 햇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조상들에게 드리는 명절입니다. 하기에 해마다 추석명절이 오면 저는 언제나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들이 그리워집니다. 지난 추석 명절 역시 저는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북의 고향과 제일 가까운 장소인 임진각에 다녀왔습니다.

가을하늘엔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가을 햇빛은 찬란했습니다. 마침 추석 당일이라 도로는 뻥 뚫려 있었지만 그래도 2시간이 걸려서야 목적지인 임진각에 도착 했습니다. 임진각 망배단에는 고향을 이북에 둔 많은 실향민들이 벌써부터 와서 차례상을 차려놓고 차례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자손녀들과 함께 북쪽을 향해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으로 차례를 올리기 위해 실향민들의 뒤에 줄을 섰습니다. 순서가 되어 올수록 마음이 어느새 짠 해 졌습니다.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빤히 바라보면서도 갈 수 없는 고향땅을 바라보며 그리운 형제들을 잠시 그려 보았습니다. 언제면 나도 저 다리를 건너 내 고향 평양으로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낯익은 친구들도 만났는데 그중에는 반가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반가운 분은 젊은 시절 대학 공부를 위해 부모님과 함께 이곳 서울로 오신 분이었는데 저에게는 마치 친 부모님과도 다름없이 각별한 사이로 지내고 있는 분입니다. 뜻밖이기도 했지만 너무도 반가운 만남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고향 이야기로 그동안 쌓인 회포를 나눴습니다. 평양 역포 구역이 고향인 그 분은 80이 넘었습니다만 아직도 구수한 평양 사투리를 쓰고 있습니다. 새 세대인 우리 가족들보다도 더한 그 분의 평양 사투리에 고향이 더더욱 그리웠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 너무도 오랜 그분은 우리 아들에게 고향에 대해서 많은 것을 물어보았는데 고향에 있는 누님과 형님 생각으로 눈에 눈물도 보이셨습니다.

고향 이야기로 상당한 시간을 보낸 우리 가족은 다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올라 망원경으로 북녘의 고향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안개가 끼어 있어 그리 맑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어느새 고향땅에 가 있는 듯 했습니다. 손자녀석들 역시 망원경으로 이 할미의 고향인 북한을 바라보다가 낮은 벽돌 아파트를 보고 이상한 집들이 있고 산에는 나무가 너무 적다고 말했습니다.

지난날 학생시절에 만약 외국인이 ‘왜 북한에는 산에 나무가 없는가’ 라는 질문을 해오면 ‘우리 산의 나무는 6,25전쟁 당시 폭격에 다 죽었다’고 답하라고 교육을 받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잠간 망설이기도 했습니다만 아직 어리고 천진난만한 손자들에게 이 할미의 고향에서는 거짓말을 하도록 교육시켰다는 말은 차마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답해 주면 거기에 따른 또 다른 물음이 이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저 그 녀석들이 알아듣기 쉽게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고 로켓 발사를 하느라 주민들에게 쌀을 공급해 주지 않으며 주민들은 옥수수나 콩을 심기위해 산의 나무를 베어 내고 또 땔감이 없어 산에 있는 나무를 모조리 베어다 땔감으로 쓰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낮은 벽돌집은 이상한 집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아파트 건물인데 층이 낮은 것뿐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5살짜리 손자 녀석이 또 “나무를 베어냈으면 벤 거만큼 심어야지”, 라고 한마디 하는 게 아닙니까. 나이 어린 손자보다도 못한 북한 당국, 나무심기를 하지 않아 올해 장맛비에도 많은 주민들과 농경지가 큰 손실을 입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니 순간 또 마음이 아팠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곳 한국생활 12년에 저에게도 많은 가족이 생겨났습니다. 내 가족과 함께 언제이면 추석날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 부모님이 좋아 하시던 음식상을 차려 드릴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 역시 늠름한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을 보시면 기뻐하실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 누렇게 익어가는 벼이삭과 얼핏 지나가는 누렇게 익은 배 과수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어머님이 좋아 하시던 저 누렇게 잘 익은, 큰 배를 따다 드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니 더더욱 부모 형제들이 있는 고향이 그리워졌습니다.

저녁상을 미루고 우리 가족은 또다시 공원으로 나와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저마다 각자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소원을 빌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건강하여 하고자 하는 일이 잘되고 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녀석들 건강하게만 자라주기를 저는 빌고 빌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하루빨리 고향에 가고 싶다고, 어서 남북이 통일되어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내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가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오랜 세월 제가 살았던 내 고향 평양에서 집을 구매 하는 꿈을 꾸었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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