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 생각] 하루 세차례 눈물
김춘애 • 탈북 방송인
2009-07-13
한 해, 또 한 해 시간과 세월이 흐를수록 제 식구는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곳 남한에 온 지 6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제 가족은 또 한 명 늘어나 모두 4명에서 7명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달 28일에 작은딸이 결혼해서 사위를 얻었습니다.
이곳 남한에 와서 벌써 두 딸이 결혼했습니다. 결혼을 얼마 앞둔 어느 날 늦은 저녁, 넓은 방에 홀로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저의 마음은 울적했습니다. 방바닥에는 작은딸의 결혼 청첩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30장의 청첩장을 놓고 ‘누구에게 보낼까?‘ 하고 생각을 하며 저는 긴 한숨을 쉬고 있는데 작은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초청장을 다 보냈느냐?”고 묻는 작은딸의 말에 제가 아직 생각 중이라고 말하자, 작은딸은 “우리는 왜 친척이 없는가?”라며 조금 서운한 말투와 함께 신부가 던지는 부케를 받아줄 친구 하나 없다면서 울먹울먹 했습니다. 순간 저의 눈에서도 눈물이 울컥 쏟아져 나왔습니다. 작은딸의 울먹이는 말이 귓전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아플 때엔 그래도 큰딸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큰딸에게 전화했습니다. 집안에서는 큰 자식, 맏자식 이상 없다더니 속담 그대로 큰딸은 “엄마는 참말 같지 않은 말에 쓸데없이 신경을 쓴다”면서 오히려 아직 철이 없는 제 동생을 나무랐습니다.
우리가 친척이 없는 것이 왜 엄마 탓이냐고, 절대로 엄마 탓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입니다. 큰딸은 우리도 고향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들만 해도 다른 집 못지않게 많은데 이것이 다 김정일 탓이라고 제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30장의 청첩장 중에서 10장을 회사 동료에게 돌렸습니다. 하지만, 딸의 결혼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나마 저의 집이 서울이라 서울에서 하면 많은 친구가 오겠는데 두 딸이 모두 경기도 평택에 있고 회사가 또 그쪽이라 평택에서 결혼식을 하게 돼서 더 올 수 있는 사람도 못 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저런 근심이 많은 가운데서도 시간은 흘러 마침내 결혼식 당일, 신부 엄마인 저는 미처 단장을 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손님인 회사 동료가 저를 찾아다녔습니다. 이렇게 덤벙 덤벙 행사는 시작되었고 사진사가 일가친척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부를 때 저는 드디어 올 때가 왔구나 하고 머리를 들었습니다. 맞은 편 사돈네 일가친척들은 우르르 몰려나오는데 저희 쪽은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켠 쪽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회사의 대표님이었습니다. 대표님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회사 동료와 함께 사진사 옆을 지나 일가친척 대열에 섰습니다. 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습니다. 이렇게 저는 작은딸의 결혼식 행사장에서 세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친척을 대신해 서준 회사 동료에 대한 감사의 눈물과 딸의 손목을 잡고 의젓하게 들어오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의 눈물, 또 사위와 딸이 나란히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 세월 고향을 떠나 북한을 탈출해 말 모르는 중국 땅에서 16살 나이에 갖은 멸시와 천대와 구박을 받으며 안 해 본 일 없이 고생하며 자란 내 딸이 어엿한 성인이 되어 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고 생각을 하니 대견하기만 했습니다. 이제 한 가정의 아내로, 언젠가 태어날 아이들의 어머니로 작은딸이 지혜롭게 살았으면 하고 기도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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