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전투에 동원된 초등학생들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16.06.03
farming_battle_b 북한 강서구역 청산리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며칠 전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퇴근길에 올랐습니다. 전철을 바꿔 타느라 잠깐 차에서 나와 녹색으로 변한 벌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작은 기계 한 대가 출렁이는 녹색 벌판을 돌고 있었습니다. 기계 한 대가 몇 바퀴 돌더니 어느새 모내기가 다 마무리 됐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다가 문득 지나간 세월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러는 사이 내가 타고가야 할 문산 방향으로 가는 전동열차가 도착했습니다.

벼 모 잎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는 벌판을 바라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만 비록 내 소유는 아니지만 날로 푸르러지는 넓은 벌판에서 쑥쑥 자라는 벼 모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북한에서는 그만한 벌판에 벼 모를 심고자 하면 군인들 한 개 중대가 동원되어 한나절을 심어도 어려울 겁니다.

전동 열차를 타고 가면서 고향에서의 지나간 추억에 잠겨있는데 남편이 모를 심어 보았는가고 뜬금없는 질문을 해옵니다. 느닷없이 질문을 하는 남편에게 중학교 시절부터 군인 생활, 그리고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애들을 등에 업고 모내기 전투와 김매기 전투에 동원되어 참가했다고 답했습니다. 남편은 자기 땅도 아닌데 왜 어린 아기까지 업고 해야 했는가고 또 한 번 물어 옵니다.

북한에서 모내기 전투에는 밥을 먹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무조건 참가해야 하고 하루라도 빠지면 당 생활 총화에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더니 남편은 놀라워합니다. 순간 저는 지나간 마음 아팠던 추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수산물 종합 상점에 근무 하던 때였거든요. 순서가 되어 4살짜리 큰 딸애와 이제 13개월이 된 둘째 딸애를 등에 업고 평양시 강남으로 모내기 전투에 갔었습니다.

당시 모내기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는 저 뿐만이 아니라 아기를 업고 참가한 분들이 여러 명이 되었습니다. 아기 엄마들끼리 순서대로 돌아가며 서로 아기를 보기로 했었는데 매일 아침 4살짜리 큰 딸애는 이 엄마를 떨어지지 않겠다고 울었습니다. 마음이 안쓰러운 생각에 저는 딸애를 논두렁 위에서 놀게 하고 모판에서 모를 뜨고 있었습니다.

순간 아이에 대한 생각을 까마득히 잊고 한창 모를 뜨고 있는데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났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4살짜리 꼬마 애가 그만 논물 속으로 허겁지겁 넘어지며 뛰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순간 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 너무도 놀란 저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막 달려가 진흙탕 투성이가 된 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알고 보니 모를 실으러 오는 소달구지를 보고 무서워 놀랐던 것입니다. 시내에서 자란 우리 아이가 황소는 처음이었거든요. 아이 엄마가 된 지금에도 그때에는 정말 커다란 황소가 자기를 금방이라도 삼켜 버릴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고 정말 무서웠다고 합니다만 4살짜리 애가 자다가도 깜짝깜짝 놀라 잠을 자지 못해 병원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내기 전투 기간 동안 내내 제가 아이보모를 했던 기억이 있네요.

해마다 건강과 취미로 서리태 콩과 들깨를 조금씩 심고 가꾸는 저는 때로는 남편에게 팔자에 없는 농사를 짓는다는 투정을 부리고 있습니다만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보면 볼수록 지금 저에게 있어서 너무도 행복한 투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어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북한의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이 모내기 전투에 동원되어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북한사회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 어린 꼬마들의 인권 유린과 노동착취가 없어지는 그날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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