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우리 아이들과 함께 이곳 대한민국에 온지도 벌써 9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내가 나서 자랐고 우리 아이들이 나서 자란 고향인 평양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탈북해 말도 모르는 중국 타향살이의 오랜 고통 속에서 떠돌이 하다가 여러 나라를 거쳐 이곳 대한민국으로 오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인천 공항에 처음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저 소박한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천국 같은 이곳 한국에서의 새 삶을 살면서 언제나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두 딸은 결혼해 이제는 한 아기의 엄마로, 한 남편의 아내로, 그리고 한 가정의 주부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들어가도 아프지 않을 손자들도 선물로 얻었습니다.
언제나 손색이 없는 늠름한 큰 사위와 조용한 편이지만 섬세한 작은 사위까지, 정말 저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들의 직업 문제였습니다. 12살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고 엄마가 없었던 탓에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갈 어린 나이었건만 학교 가는 것은 생각조차 해볼 수 없었던 아들은 항상 책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아이들이 부러워 남모르게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들이 이곳 한국에서 3년의 검정고시를 마치고 지금까지 중국 음식점에서 배달 일을 해 왔습니다. 어린 나이에 학교 대신 본인의 생계유지를 위해 떠돌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오랜 세월 관리소에 갇혀 있어야 했던 아들. 북한에서는 대학에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한국에 와서 아들만은 꼭 대학에 보내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달 손전화기 요금을 많이 쓴다하여 20일간의 여름 방학기간에 부업을 시켰던 제 잘못으로 아들은 그만 대학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이곳 한국에서는 대학공부는 나이와 관계없이 또 친분의 관계없이 본인이 하고 싶을 때면 60살이든 70살이든 할 수 있고 또 대학 문은 언제든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이 당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게 했지만 그래도 중국 음식을 배달하는 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름대로 배달 일을 하면서도 짬짬이 토목 공사에 쓰는 중량이 큰 기계를 다루는 중장비 면허 시험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아들을 보며 하루 빨리 내 아들도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저는 항상 아들이 비록 대학은 나오지 못했어도 이곳 한국생활에 잘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당당하게 자랑해왔습니다. 그러다 지난 7월1일부터 아들은 제가 바라던 대로 당당한 회사 직원이 됐습니다. 6월말 평택에 있는 회사의 면접을 봤는데 합격이 됐던 것입니다. 벌써 회사에 취직한지도 한 달이 됐습니다.
며칠 전에는 아들이 다니는 회사 사장님과 부장님으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아들이 말없이 일을 잘한다는 칭찬의 전화였습니다. 저는 아들이 너무 대견해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 주말 아들은 홀로 있는 엄마가 걱정되어 집에 다녀갔습니다. 저는 아들과 함께 날이 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들의 나이가 벌써 27살이니 적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제는 장가갈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 등의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아들의 말을 듣고 저는 괜스레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들은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싶었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싶었지만 몸의 상처 때문에 사실은 자신이 없었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저 "이곳 대한민국에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하고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지금까지 아들에게 강한 엄마의 모습만을 보여 왔던 저는 눈물을 보이는 것이 싫어 딴전을 피면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늦은 밤이었지만 아들은 분위기를 바꾸어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제게 부어 주고는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서 밤거리가 멋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막걸리 잔을 손에 든 채 밖을 내다보면서 다시 한 번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이제 남은 인생은 눈물 흘리지 않고 보다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만들어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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