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과 평양의 추억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14.11.06
pyongyang_foliage_305 평양 시내가 가을이 깊어 가는 가운데 단풍이 곱게 물든 공원을 한 가족이 산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어느새 단풍도 절정에 이르러 동네 아파트 단지 작은 공원의 나무 잎들은 마치 울긋불긋 꽃이 핀 듯 합니다. 아침 마다 공기 갈이 하느라 창문을 열면 괜스레 마음이 즐거워지기도 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오기도 합니다. 지난 주말 저는 조금 늦은 점심을 먹은 뒤 동네 작은 공원에서 손자들과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손자들과 시간을 가진 것이 오랜만인 듯도 합니다. 손자들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느라 여념이 없었고 개구쟁이들의 대견한 모습에 저는 잠시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공원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때로는 동심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선들바람이 불자 은행나무 잎과 은행 알들이 후드득 떨어져 제 발등에 말없이 앉기도 했습니다. 발잔등에 떨어진 색깔 고운 은행나무 잎 한 개를 손에 들었습니다. 지난날 고향에서 바퀴를 없애려고 방 구석구석 은행잎을 깔아 놓았던 추억이 피뜩 떠오르기도 했습니다만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봄이면 초록색의 은행잎이 나고 초여름이면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고 가을에는 은행 알들이 노랗게 물들고 또 늦은 가을이 오면 은행 알과 은행잎이 모두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제 마음 어찌 보면 조금 쓸쓸한 생각도 없지 않아 있지만도 또 다른 생각도 가져 보았습니다.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에는 친척 하나 없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이곳 외진 곳에서 남편도 없이 어떻게 아이들을 적응 시키며 살아가나 하는 착잡한 생각이 없지 않아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작은딸과 함께 택시를 타게 됐습니다. 목적지를 대자 택시 기사 아저씨는 고향이 어딘가부터 물어 왔습니다.

저는 그저 평양이라고 말했는데 작은 딸은 저에게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는 딸의 모습에서 택시 기사 아저씨는 그 근방에 북한에서 온 탈북자분들이 많이 살고 있다면서 열심히 사느라면 좋은 날이 꼭 온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뜬금없이 작은 딸은 택시 기사님의 연세를 물으면서 어떻게 아저씨는 그렇게 동안이냐고 물었습니다. 작은 딸의 뜬금없는 그 물음에 저는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기사님은 허허 웃으시더니 마음을 비우면 된다고 첫마디를 뗐습니다. 젊은 시절 리비아에 가서 많은 돈을 벌어 왔는데, 경제적으로 가장 어렵던 90년에 사업을 하다가 몽땅 실패 했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아내와도 이혼을 했고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 시도까지 했던 가슴 아픈 기억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리비아 출신의 한 친구가 찾아와 20만원과 함께 밥과 소주 한잔을 사주면서 힘내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기사님은 택시 기사를 하면서 모든 짐을 내려놓기로 했다고 합니다. 마음을 비우니까 모든 것이 편해지고 마냥 즐겁기만 하드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때로 자신의 머리가 조금 이상해 졌다고도 말했었지만 그런 얘기도 좋은 의미로 듣고 해석하고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곤 하니 괜스레 마음이 마냥 즐겁다고 합니다.

주변의 친구들과도 관계가 저절로 좋아지고 또 고객들과도 친해지니 하는 일 또한 즐겁고 재미가 났다고 합니다. 그 후 다시 가족과 재결합하게 됐고 지금은 편하고 행복한 생활을 만들어 가며 살고 있다는 그 택시 기사님의 말씀이 기억이 났습니다. 은행나무 역시 봄에는 잎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다음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열매가 달리고 가을에는 잘 익은 열매가 떨어지고 늦은 가을에는 홀가분하게 잎과 열매를 몽땅 털어 버리는 모습이 나름대로 어떻게 보면 제 인생과 꼭 다를 바 없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 보았습니다.

량 부모님의 슬하에서 태어나 어른으로 자라나고 출가를 해 누구의 아내가 되고 또 아이들을 출산해 키운 자녀들을 출가 보내고 그들 역시 한 가정의 아내로 엄마로 이 엄마와 꼭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나도 우리 부모님들처럼 이제는 어느덧 검은 머리 파뿌리 되어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예쁜 손자녀석들과 이렇게 동네 공원 나무 그늘에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여유를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정말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만들어 가며 사는 나의 인생이 이런 천국 같은 세상이 아니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새삼 해 보았습니다.

내 고향 평양에도 가을이 되면 빨간 단풍과 가을 쑥꽃과 빨간 홍초꽃 장식으로 인해 거리가 아름다웠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는 마음의 무거운 짐과 여유가 부족한 탓으로 인해 그 아름다움을 몰랐습니다.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면 아깝고 아쉽지만 저는 지금 내 고향에 있는 분들에 비하면 정말 선택된 인간으로서 늦은 시간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해 봅니다.

아깝고 아쉬운 시간과 세월을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서라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려 놓을 생각과 마음은 간절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마도 인생인가 봅니다. 요즘 60이 청춘 90이 환갑이라는 말이 있듯이 은행나무와 같이 쓸데없는 욕심과 욕망을 훌훌 털어 버리고 눈에 들어가도 아프지 않은 손자 녀석들뿐만 아니라 내 가족을 위해서 보다 더 좋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가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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