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 ⑳보천보 전투

워싱턴-이규상 leek@rfa.org
2010.07.27
postage_bocheonbo-305.jpg 2007년 북한에서 발행된 보천보전투승리 70돌 기념우표.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에서 보천보 전투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보천보 전투가 항일무장투쟁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남한의 역사기록에서는 크게 부각되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에서 그 이유를 알아봅니다.

1937년 6월 4일. 지금의 량강도 지역인 보천보에서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소속 부대원들이 일본 경찰 병력과 전투를 벌인 후 일시적으로 점령하다 퇴각한 사건이 보천보 전투입니다.

당시 보천보에 있던 지하조직으로부터 그 지역의 경찰병력의 경계가 느슨하다는 정보를 전달받은 김일성은 많지 않은 병력을 이끌고 이 지역의 일본 행정기관들과 경찰 주재소를 급습합니다. 김일성의 생애에 대해 연구해온 전 하와이 대학교의 서대숙 교수는 보천보 전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대숙: 만주에서 조선혁명군을 조직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중국 동북한길연군의 소속 부대였다. 김일성이 자기 부하 200명 안되게 데리고 혜산진에 데리고 와서 그 시를 점령했다. 그곳에 일본 경찰이 다섯명 정도 있었는데 그들을 죽이고 그 마을에서 전투하는데 필요한 식량과 인력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 이틀 정도 있다가 만주로 돌아가는 길에 쫒아오는 일본군을 격파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보천보 전투가 군사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단순 소동에 불과했지만 김일성이 의도한 바와 같이 일제의 지배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합니다.

또 보천보 전투는 당시 26살 밖에 되지 않았던 김일성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보천보 사건에 대해 두 번이나 호외를 발행해 전국에 보도했고 김일성은 순식간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떠올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중도파였던 여운형 뿐만 아니라 김일성과는 반대 노선을 걷고 있었던 김구 선생도 보천보 전투의 결과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보천보 전투는 지난 50여 년 동안 김일성의 항일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중요한 선전 자료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말하는 보천보 전투는 크게 과장되어 있다고 서대숙 교수는 말합니다.

서대숙: 진실은 이미 다 알려져 있다. 지금 이북에 가면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를 기념하는 조선혁명박물관에 마치 레닌이 러시아 혁명을 주도했을 때와 같은 장소를 마련해 놨다. 그것은 그림을 뿐이고 아주 많이 과장한 그림이다.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50여명과 조선인 1300여 명 그리고 중국인 10명 등 총 1380여명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무장인력도 경찰서에 있는 5명의 일본경찰 뿐이었습니다. 이미 경계가 허술하다는 첩보를 받은 김일성은 아주 쉽게 경찰들을 제압하고 무기고에서 총기를 탈취 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은 김일성 부대가 보천보에서 철수하기 전에 ‘한인조국광복회 목전 10대 강령’과 ‘일본군대에 복무하는 조선인 병사들에게 고함’이라는 수 십 여장의 삐라를 ‘북조선 파견대’라는 이름으로 살포했다고 주장합니다.

북한에서는 또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더미 옆의 달구지 위에 서서 환영 나온 수 백 명의 인민 앞에서 멋진 연설을 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김일성의 연설을 들은 증인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남한의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투쟁을 한 것은 사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북한 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실제 공로 보다 엄청나게 과장이 되고 왜곡되게 선전하는 것은 김일성 항일 혁명 역사의 한계라고 지적합니다.

한편 북한과 반세기 넘게 대치해온 남한은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에 대해 크게 평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서 보천보 전투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서대숙 교수는 말합니다.

서대숙
: 한국은 다른 이름으로 혜산진 사건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천보라는 곳이 혜산진에 있기 때문이다. 이북에서는 보천보 전투라고 하지만 남한에서는 혜산진 사건으로 알고 있다.

남한의 일각에서는 보천보 전투가 북한이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날조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연구해온 고 이명영 전 성균관 대학 교수는 ‘김일성 열전’이라는 책을 통해 보천보 전투에서 싸운 김일성은 1887년 태어난 일본육사 출신의 본명이 김광서라는 사람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본명이 김성주 이었던 북한 김일성이 항일 투쟁 투사로 둔갑한 것은 소련정권이 해방후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지명도가 높은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이명영 교수는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서대숙 교수는 북한이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에 대한 업적을 과대 포장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일성이 항일투쟁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전면 부인할 근거는 없다고 말합니다.

서대숙: 그 사람도 옛날에 만주에서 처음 시작하면서 감옥에도 갔었고 양세봉 이라는 사람 밑에서도 싸웠고 중국 사람들과도 함께 싸워 그들의 도움을 받고... 그런 것이 많이 있다.

서대숙 교수는 북한이 한반도 역사를 기록해 놓은 ‘조선력사’ 34권 중 절반 이상이 김일성의 혁명역사를 과대 포장하고 있는 점. 그리고 남한의 역사학계에서 1930년대 공산주의운동이 항일투쟁에 기여한 공로를 평가절하 하는 일들은 앞으로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조율해 나가야 할 과제라고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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