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LA 를 중심으로 서부 지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소식과 한인사회소식 등을 전해 드리는 LA 생생 뉴스 진행에 재미 언론인 정현숙 씨입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전해드릴 소식입니다.
-로스엔젤스 출신의 한인 의사가 휴전선 가까이 휴전선 평화 진료소를 열고 그곳 주민들과 국군장병들을 위해 의료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휴전선 북쪽에서 북한 주민들의 치료도 희망하고 있습니다.
-로스엔젤스에서 백인 경찰관의 흑인 구타 사건으로 인종간의 갈등이 불거졌던 4.29폭동 이후 한인들을 비롯한 다민족들이 화합하며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전합니다.
-미국 내 한인들이 경영하는 사업체의 3분의 1이 캘리포니아에 있으며 이중 반수가 로스엔젤스에서 영업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비무장 지대에 남한주민과 북한 주민들이 함께 사용하는 민족병원 설립의 꿈을 안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해 활동하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출신 한인이 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유엔아이라는 꽤 큰 치과를 운영하며, 평화병원재단을 설립하고 북한 의료선교에 열심이었던 치과의사 남영한 원장입니다.
남 원장은 지난해 말 치과병원을 정리한 뒤 올해 초 한국으로 영구 귀국해 현재 휴전선 인근에 '휴전선 평화진료소'를 개원하고, 인근 대성동, 통일촌, 해마루촌 주민들과 학생, 국군장병들에게 의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대성동은 북한의 기정동과 마찬가지로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유일한 마을이며, 해마루촌과 통일촌은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있는데 이곳은 지난 60년간 병원이 없던 곳이어서 마을사람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옛날부터 살고 있는데 요새 같이 모든 것이 발달한 시대에 병원 하나 없다는 말이 믿기지 않아 되물은데 대해 남 원장은 이곳으로 오고자 하는 의사들이 없다고 말합니다.
남 원장: 제가 진료소를 이렇게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차라리 케냐를 간다든가 몽골을 간다는 선교사는 그렇게 많은데 정작 우리나라의 최 북방에 있는 무의촌 지역에 봉사를 오십시오, 하면 아직 선뜻 나서는 선생님 들이 많지 않습니다.
남 원장은 이 지역에서 의사를 구하기도 힘들뿐 아니라 자신도 아직 한국면허가 없기 때문에 일 년에 2-3주 만 진료가 가능해 다른 의사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했습니다. 또 진료소는 아주 작은데, 그곳에 주둔해 있는 전방 군대 내 의료시설도 열악해 군지휘자들이 군인들도 돌봐주면 좋겠다고 부탁해와, 생각지도 않게 일이 많아졌다는군요
그런데 남원장의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군인들이 가끔씩 세미나 강연자로 초빙해 미국생활이나 전역 후 학업 등에 관해서도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은퇴 후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의사들은 이곳에 오면 뜻있는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남 원장은 왜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올해 예순 여섯인 남원장도 휴전선 근처 마을 출신입니다. 당연히 어려서부터 육이오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많이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친한 친구 가족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외삼촌 두 명도 살해당하는 슬픔도 있었습니다.
나이 마흔에 뒤늦게 치과공부를 시작한 동기도 이다음에 휴전선 근처에 가서 봉사를 하고 싶은 때문이었습니다. 마흔넷에 학교를 마친 남 원장은 2004년 치과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로스앤젤레스에서 '휴전선에 평화병원을 세우자' 라는 운동을 시작하며 평화병원재단을 설립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의 다른 한인들도 동참한 이 재단에서는 그동안 북한에 인도적인 지원으로 구충제를 비롯한 의약품을 전달해왔습니다. 그러나 평화병원재단 활동을 하면서도 늘 아쉬움을 느껴온 남 원장은 은퇴 나이가 다가오면서 삶의 의미를 고민하다가 이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단추를 꿰기 시작한 겁니다. 20년이란 세월 동안 의사로서 사회에 봉사 했고 가족에게도 그만큼 했으면 이제 모국에서 민족 간 교류를 위해 봉사할 때란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남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남 원장: 제가 40살에 치과대학에 입학해 44살에 의사가 될 때 하나의 동기 부여가 이다음에 기회가 오면 내 고향으로 돌아가서 휴전선 가까이에 평화병원을 짓고 남북한의 주민들, 환자를 돌보면서 여생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44살에 의사가 되어서 로스엔젤스로 돌아왔습니다.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으니까 치과의로서는 아주 크게 병원을 운영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 이 정도의 나이면 우리 가족들을 위해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가족이나 우리 집사람 입장에서는 다르게 생각하고 그래서 시련도 많고 힘들었지만 제가 설득해서 최근에는 특히 집사람이 호응을 많이 해주고 기회가 되면 남편 뒤를 따라서 봉사하겠다는 한 단계 올라선 상황입니다.
현재 그가 머물고 있는 곳과 진료소가 있는 곳은 휴전선이 보이는 곳, 따라서 이곳을 방문하려면 국방부의 신원조회를 거쳐 승인을 받아야할 정도로 출입통제가 엄격한 최전방입니다. 매번 드나들 때 마다 통행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기도 하지만 그래도 봉사의 기쁨이 너무 즐거워 불편함은 못 느낀다고 휴전선 지역에서의 생활을 전합니다. 남원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한의 환자들도 돌보아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이삼년 경험이 쌓이고 기회가 되면 개성공단, 그 다음에는 개성시내까지 가서 환자들을 돌보아주고 싶다는 소망으로, 그는 오늘도 열심히 휴전선의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지난 4월29일은 로스앤젤레스 한인들의 이민 사상 가장 가슴 아픈 날 중 하나입니다. 19년 전에 일어났던 4.29 폭동으로, 당시 많은 한인들의 가게가 불에 탔거나 약탈을 당해 쑥대밭이 되었고 젊은 한인 한명이 총상으로 사망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폭동의 최초 원인은 그보다 한 달 앞선 1991년 3월, 로드니 킹 이라는 흑인청년이 여러 명의 로스앤젤레스 경찰관에 의해 곤봉으로 심하게 구타당한 것이었습니다. 헌데 그 장면이 반복해서 뉴스에 나오게 되자 흑인들이 분개한 가운데 폭행을 한 경찰관들에 대한 재판이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에서 그 4명의 경찰관에게 무죄가 내려졌습니다.
4월29일 오후 3시 경찰들에게 무죄평결이 내려지자마자 흑인이 많이 사는 로스앤젤레스 남부 지역의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그쪽을 지나가던 한 백인트럭 운전사를 차에서 끌어내려 구타하는 것을 시작으로 흑인들이 폭도로 변했습니다. 폭동은 흑인들이 일으켰으나 그들이 점점 한인촌이 있는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한인촌 인근의 라틴계들도 가세하여, 흑인 촌에 있던 한인상점들은 물론 한인촌의 상점을 약탈했으며 물건을 약탈해가는 폭도들과 물건을 사수하려는 업주들 사이에 총격전도 벌어져, 그 와중에 한 한인젊은이가 총격으로 사망 했습니다.
이 폭동으로 2천개가 훨씬 넘는 한인업소들이 화재, 물건약탈 등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백년의 한인이민사 중 가장 큰 시련이었지만, 한인들은 4.29 폭동으로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교훈을 얻었습니다.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미국정치에도 진출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인종 미국 사회에서 백인 뿐 아니라 흑인, 라틴계 등 다른 소수 민족과도 어울려 살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따라서 매년 4.29가 되면 한인촌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열립니다. 올해도 한인과 흑인의 화합을 위한 권투대회, 4.29 폭동을 주제로 한 연극, 세미나, 글쓰기 대회 등이 열렸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소방국의 부국장인 에밀 맥 씨는 한인입양아 출신으로, 한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흑인가정에 입양되어 오늘날 소방국의 고위직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는 폭동 당시 직접 한인촌에 출동해 한인촌 상가들이 불타는 것을 보고 받은 충격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며, 폭동은 불행한 사건이지만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인종이 모여 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화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미국 내 한인 사업체의 33퍼센트가 캘리포니아에서 영업 중이며 또 그중 절반이상이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방정부가 지난 2002부터 2007년 사이의 아시아계 사업체를 분석해서 나온 결과인데요,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는 약 20만개로 그중 33퍼센트인 6만5천개가 캘리포니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33퍼센트인 이들 업소가 벌어들인 수입은 한인업소 전체 수입액의 42퍼센트로 캘리포니아에서 장사하는 한인들의 돈벌이가 다른 지역 상인들의 돈벌이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다음으로는 역시 뉴욕에 사업체가 많았습니다. 한편 미 전국적으로 볼 때 한인들이 가장 많이 운영하는 업체는 각종 수리와 보수 업, 서비스업, 세탁업 등 이었으며 도매, 소매업 등도 많았습니다. 이들 한인기업이 고용하고 있는 총 직원 수는 43만 명이나 되었지만 아직은 대부분이 소규모여서, 50명 이상의 직원을 둔 중형 기업은 전체의 1퍼센트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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