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방송하는 RFA 자유아시아 방송처럼 한국에는 북한 관련 뉴스를 전문으로 전하는 언론이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이들 중에는 탈북자도 있습니다. '꿈은 이뤄진다' 오늘 소개하는 탈북 여성 김선아(가명) 씨는 2006년 탈북해서 지금은 한국에 살면서 북한의 실상을 고발하는 자유 기고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언론인을 꿈꾸는 김 씨의 이야기 전해 드립니다.
진행에는 저 이진서입니다.
김선아: 북한에서처럼 구애받는 일 없이 자기 능력대로 일할 수 있는 것에 남한이란 느낌을 받습니다.
북한에서 유치원 교사였던 김선아 씨가 탈북한 것은 2006년. 다른 탈북자들이 거쳤던 것처럼 중국에서의 짧은 생활을 지내고 제3국을 통해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이제 한국 생활이 햇수로 2년 차인 김 씨는 북한에서 부터 한국 사회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왔습니다.
김선아: 저희 집은 국경 지역에 있었습니다. 중국을 많이 접하면서 한국 영화를 많이 보고 음악도 자주 들었습니다. 고향에서 생각할 때 한국엔 부자만 사는 줄 알았습니다. 한국 사람은 일도 안 하고 소위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 가서 일해 주고 먹고사는 줄 알았습니다. 한국 사람은 모두 잘사는 부유층인줄 알았죠. 그러다가 중국에 와서 그 생각이 변했습니다. 일한 것만큼 먹고, 자기가 노력한 것만큼 돈을 받는다고 차츰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김 씨는 혼자만의 행복을 위해 탈북했던 것은 아닙니다. 대학도 나오고 2년 6개월 동안 유치원 교사를 하면서 남들보다 못할 것이 없었던 김 씨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맡은 일에 충실해도 넘지 못하는 벽을 느끼게 됩니다. 김 씨는 북한에서 1호 공연 행사에 출연하는 시의 대표가 되어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사는 시에서뿐. 도에 가서는 행사에 나가지 못한다는 통고를 받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출생에 관한 문제가 김 씨의 발목을 잡았던 겁니다.
김선아: 시에서 책임지고 갔던 일꾼이 우리 토대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미해명으로 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탈북했던 것은 아니지만 다시 그런 일이 반복 되면서 생각이 변했습니다. 토대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과거의 문제 때문에 좌절을 맛본 그때 이미 김 씨는 중국을 통해 외부 세상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김 씨는 서서히 혼란에 휩싸이게 됐고 자꾸 머릿속에는 비디오를 통해 본 한국 사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조그마한 토지 농사를 해서 알곡을 판 돈으로 자신을 대학까지 보내준 부모님께는 더욱 죄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한 번 마음이 돌아선 김 씨는 더는 북한에 살 수가 없었습니다.
김선아: 그때까지는 중국과의 국경을 넘으면서 한국까지 간다고는 생각 안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 여성이라면 누구가 경험하는 현실 즉 인신매매, 북송 당할까 숨도 제대로 못 쉬는 현실 이런 것들 때문에 오직 내가 살길은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 밖에는 없다고 생각을 굳히게 됐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들 하지만 김 씨는 탈북했고 국경 앞에서 중국 공안에 잡혀서 강제 북송도 한 차례 당했습니다. 그는 태어나 생각도 못했던 보위부 구류장에서 족쇄를 차고 있어도 봤고 누구를 원망해야할지 서러워 울기도 무척 울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탈북자라는 딱지가 붙은 김 씨였기에 두 번째 탈북에는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기회가 다시 왔고 바로 재탈북을 해서 그 길로 한국행을 합니다. 그리고 김 씨가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제일 처음 준비한 것은 마음을 비우는 일.
김선아: 한국에서 나를 알아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한국에 정착하자면 환경이나 조건을 가리지 말고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하나부터 모두 다시 배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뭘 선택하든 절대 물러서지 말고 일에 만족할 때까지 해내자 하는 각오를 하고 시작했습니다.
올해 서른 살인 김 씨가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식당일. 오전에는 컴퓨터 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식당에서 손님들이 먹은 접시를 치우는 접대원으로 일했습니다. 새벽 2시까지 하는 식당일은 김 씨로서는 쉽지 않은 육체적 노동이었지만 첫걸음부터 후회 하면 평생 후회하면서 살까 봐 어금니를 꽉 물고 참았습니다. 그럴 때면 더 고향 생각이 났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가면 그리움도 엷어진다고 했던가? 이제 고향 생각에 눈물짓는 때보다는 열심히 살아 보자는 결심이 앞섭니다.
김선아: 고향에서 부터 꿈이 있었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을 기사로 올리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작지만 능력껏 기자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안 오고 북한이나 중국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 지금 북한의 현실상을 그대로 우리가 체험한 바대로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김 씨는 이제 불안에 떨면서 숨어 살지 않아도 되고 떳떳한 국민으로 산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몸으로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당당히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겁니다.
김선아: 자기 능력대로 일할 수 있는 것에서 남한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유도 좋지만 자기 능력대로 평가받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제가 글을 쓰면 회사로부터 평가를 받고 타인들로 부터도 지지를 받고 할 때마다 내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북한에서 지금 쓰는 글을 쓴다면 정치범 수용소에 갔을 겁니다. 능력대로 사는 것이 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김 씨는 내년엔 꼭 대학에 간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있습니다. 아직은 한국 생활을 잘 모르기 때문에 좀 더 사회를 안다음 어떤 공부를 할 것인지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대학진학을 미루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탈북자가 만 서른다섯 이전에 대학 공부를 원할면 등록금을 지원해줍니다. 하지만 적잖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면 졸업 때는 이미 30대 중반을 넘게 돼 결혼이 늦지 않겠는가? 기자가 질문했을 때 김 씨는 미래에 대한 그리고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있기에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김선아: 북한에선 21살부터 23살까지 금값이라고 여성들을 놓고 값을 평가하는 속담이 있는데 한국 오니 30대가 금값입니다. 제일 일을 많이 하고 활동을 하는 나이인 듯합니다. 결혼도 해야겠지만 결혼이 급하진 않습니다. 서른다섯 까지 탈북자 대학 공부를 지원하고 하니까 좀 더 배울 수 있을 때 배워야지 하는 욕심 때문에 결혼을 미루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꿈은 이뤄진다” 이 시간에는 2008년 한국에 입국해 언론인이 되려고 준비하는 탈북 여성 김선아 씨의 얘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