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회고록을 펴낸 '6.25국군포로가족회'의 유영복 회장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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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국군포로가족회 유영복 회장(가운데).
사진제공: 6.25 국군포로가족회
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한국정부가 밝힌 6.25 전쟁 국군포로의 수는 실종자를 포함해 약 4만명. 그 중에 송환자와 전사 처리자를 제외하면 북한에 억류된 포로는 2만명 정도. 하지만 정전 58주년이 되는 2011년 7월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군포로는 약350명뿐입니다. 이 생존 국군포로들의 송환을 위해 포로 가족들과 탈북 포로들이 세운 단체가 있습니다. ‘6.25국군포로가족회’입니다. 이 단체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50년동안 국군포로로 살다가 나이 70에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귀환한 유영복 씨입니다. 그가 탈북 11년만에 최근 회고록을 펴냈습니다. ‘운명의 두날’이란 제목의 이 회고록에서 그는 6.25 남침 인민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비극에서부터 국군으로 강원도 전쟁터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포로가 돼 함경남도 탄광에서 40년 넘게 광산노동자로 살면서 겪은 역경과 목숨 건 탈북 후 남한땅에서 꿈에 그리던 아버지와 재회한 감동까지를 생생하게 적고 있습니다.

전수일: 책 처음에 운명의 두날이라고 쓰셨는데 1950년 6월 25일이야말로 한반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운명의 날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6월 마지막 주일 야간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보트놀이를 갔다고 하셨는데.

유영복:지방에서 올라온 제 친구 몇이 마포강에 가서 보트놀이 하자고 한 날이 6월 25일입니다. 우린 그런 사태가 벌어질줄 몰랐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3.8선 인근에서 무장충돌이 드문드문있었기 때문에 또 그런거겠거니 하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뒤에 알게 된 거지만 북한은 이미 남침 준비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대비를 안했기 때문에 일요일인 그날 장병들이 휴가를 많이 갔습니다. 너무도 준비가 없어서 서울이 이틀도 못 돼 함락당하고 초기에 피해를 당한거지요.

전: 인민군 의용군 포로로 잡혀 스무 살에 거제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됐었고 1952년 풀려난 두 달만에 곧바로 국군에 입대하셨다고하셨죠.

: 그렇습니다.

전: 1953년 6월 강원도 김화지구 최전선에서 중공군 공격받고 포로가 됐고 한 해 뒤인 54년 9월에 한국군에서는 전사한 걸로 알고 화랑무공훈장까지 수여했다는데요.

: 그렇죠. 제가 당시 잠복근무를 하러 나갔었습니다. 잠복근무 나가면 통상 100명 중에 살아온 사람은 한 두명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잠복근무를 나갔었고 실종됐으니까 전사한 것으로 처리돼 훈장이 내신된 모양입니다. 물론 저는 그걸 몰랐죠.

전: 그 다음 포로로 끌려가 함경남도 검덕광산에 투입되셨는데 포로병이 아니고 내무성 건설대원이라고 해서 광산노동자가 됐고 광산일은 24시간 3교대로 당시 노역 상황을 책에 다음과 같이 적으셨습니다. “이 지옥에서 꼭 살아 돌아 가리라.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견디고 어떻게 죽어갔는가를 반드시 살아남아 낱낱이 이 세상에 명백하게 증언하리라. 그 힘든 광산노동에서 너무도 많은 동료들이 혹사당했으며 불구자가 되고 병들고 처참하게 죽어 나갔다.” 얼마나 그 광산노동이 힘들었습니까?

: 북한의 검덕광산은 광산 중에서도 그 노동강도가 제일 센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 광산은 지하 깊숙히 내려가 좌우로 뻗었는데 어떤 곳에서는 일을 안하고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릅니다. 빤쯔와 셔츠만 입고 있어도 그렇습니다. 이조 때부터 몇 백년 파 온 광산이라서 지하로는 5,6백미터에서 천미터까지 내려가고 좌우로는 3천에서 4천미터 들어가야합니다. 광내에서 폭파하니 가스가 나오고 공기가 나쁩니다. 돌가루 먼지가 항상 차 있습니다. 노동강도도 셉니다. 원시적인 방법으로 돌과 광석을 광차에 퍼 담고 인력으로 밀고 나가야 하니 너무 힘들죠. 다른 광산도 작업환경이 나빴지만 검덕광산은 더 나쁠 수가 없었습니다.

전: 그러니까 불구자가 된 분들도 있고 병들고 죽은 사람들도 많았겠군요.

: 그렇죠. 오죽 사고가 많았으면 김일성이가 검덕광산에 와서는 피묻은 광석은 필요없다고 말했겠습니까. 사고 안 나는 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전: 그런데 건설대원들이 빨리 안정되도록 집단결혼도 시켰다고 쓰셨습니다. 그리고 결혼 상대인 북한여성들에게는 대원들이 국군포로라는 걸 모르게 했다고 하셨는데, 왜 그걸 숨기려 했습니까?

: 북한은 53년도 포로교환을 할 때 한 8천명의 국군포로를 송환했습니다. 나머지 몇 만명은 강제로 억류했습니다. 53년 휴전 된 다음 북한은 국제사회에 국군포로는 더 이상 없다고 선언했는데 포로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안되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북한당국은 우리 포로들에게 견장을 안 달은 인민군복을 입혀서 무장보초의 감시를 받게하며 집단적으로 아오지탄광등 탄광지대에 투입하고 끌고 다녔습니다. 1956년까지 그랬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견장없는 군복을 입은 우리들이 군인인지 아니면 포로인지를 알 수가 없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건설대원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그런식으로 계속 끌고 다니다가는 외부인들도 우리들의 정체에 대해 의혹을 갖게 되고 우리 포로들도 반항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북한당국은 우리를 이른바 북한공민화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영예로운 북한 공민증’을 준다면서 자유석방이란 명분으로 광산에 풀어 놓았지만 사실은 옷만 갈아 입힌 것 뿐이었습니다. 우리를 결혼시킬 때에 일반 사민들에게는 남한에서 들어온 해방전사라고 소개했습니다. 전쟁을 하다가 북한 편으로 넘어 온 사람이란 뜻이죠. 포로라는 말은 입밖에 나오지 않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혼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사민들은 우리들의 구체적인 신분을 따지려 하지 않았고 그냥 남한에서 의용군으로 들어온 사람이겠거니 생각 했죠. 북한 당국은 북한 간호원들을 시범적으로 포로들과 결혼하게 했습니다. 또 포로 자신들도 결혼하면서 자신이 국군포로 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전:그런데 유영복 씨는 광산노동 하나로도 기진맥진하는 일일텐데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광산측량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셨습니다.

: 그 이유는 제가 지금도 건강이 나쁘지만 그 당시에도 몹시 나빴습니다. 1956년까지 그 광산 일을 해보니까 내 체력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중노동을 조금이라도 면하기 위해 측량기술자가 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그 당시 북한은 전후복구에 기술자가 많이 모자랐고 광산에서도 기술자가 부족해 기술자 양성을 한다는 구호를 많이 내 걸얼었습니다. 중학교 학력이 있었기에 기술학교에 신청해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측량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며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너무 힘들어 앓아 눞기도 하면서 간신히 버텨 냈습니다. 당시 포로 중에 몇 사람이 그렇게 했습니다.

전: 어머니와 재회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친정인 황해남도 연백군에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가셨다는데, 동생도 있었다죠?

: 네명이었습니다. 여자 동생 둘에 남 동생 둘이었습니다.

전: 꿈같은 재회였지만 당시 어머니와 동생들은 토굴같은 곳에서 생활을 하고 계셨다죠?

: 토굴도 보통 토굴이 아니더라구요. 가마니 떼기 몇 개도 못 깔고 지붕은 양쪽에 걸쳐 놓은 상태인데 저는 설마 그런 토굴집일 줄은 몰랐습니다. 황해도에 살던 원주민들은 초가집을 지어 줬는데 어머니는 전쟁통에 서울에서 친정집에 피난 온 사람이라고 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렇게 홀대한 겁니다.

전: 그러니까 남한쪽에 살다 온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차별을 뒀다는 말이군요.

: 네.

전: 어머니와 동생들은 만났지만 남쪽에는 아버지와 여동생이 남아 있었습니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셈이었고 그래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셨다죠.

: 그렇습니다. 당시에 어머니 친정집이 있는 곳은 3.8 이남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휴전이 되면서 서부쪽은 남한 땅이 북한으로 편입되고 강원도쪽은 그 반대로 됐습니다. 1957년 포로복을 벗고 북한공민증을 받아 북한사회에 나온 뒤에 휴전선은 3.8선과는 달리 설정됐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서해쪽과 개성은 북한지역이 많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우리 어머니 친정 고향이 황해남도 연백인데 그곳이 혹시 북한사람들이 말하는 신해방지구가 되지 않았나 해서 물어봤더니 그렇게 됐다고 하더군요. 우리 어머니가 전쟁통에 친청집에 가셨는데 거기에 아직 살아 계실지 모른다면서 윗사람들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죠. 알아 보더니 거기에 살아 계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휴가를 얻어 그곳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게 된 겁니다.

전: 거기서 어머니가 소개한 고향 아가씨와 결혼하셨고,어머니와 재회한지 2년 뒤인59년 11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죠. 앞으로 효도할 세월이 많았으면 바라셨을 텐데 짧게 끝나서 아쉬웠겠습니다.

: 그렇죠. 어머니가 당시 나이가 55세였었더라면 광산에 모시고 갈 수 있었겠지만 53세 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광산지역에 배치된 몸이라서 어머니 쪽으로 갈 수도 없었고 보내 주지도 않았습니다.

전: 55세라는 무슨 규정이 있었습니까?

: 그렇죠. 당시 남북한 모두가 여자는 55세 남자는 60세가 정년퇴직할 수 있는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55세가 되면 노력자(근로자)를 그만두고 자식의 부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 그렇군요. 53세에 돌아가셔서 모시지도 못하고 굉장히 가슴 아프셨겠습니다. 다시 광산 일로 돌아가서, 많은 포로출신들이 잘 살아 보겠다고 당원의 꿈을 꾸고 노력하면서 노동에 혹사 당했지만 국군포로 출신이란 신분 때문에 비참한 말로를 보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쓰셨는데요.

: 그거야 뻔한 일이지요. 자기들에게 총뿌리를 들이 댔던 사람들인데 간부로 등용하겠습니까? 북한에서는 사람을 쓰거나 간부를 뽑을 때 그 기준이 출신성분입니다. 국군포로야 두 말 할 필요 없지요. 우리를 내무성 건설대원 신분에서 북한공민으로 바꿔 줄 때는 포로가 아니라고 했지만 실제 우리 신분은 이미 포로로 정리가 됐습니다. 우리를 이용할 때는 일반 사민이나 원주민과 동일하게 대우한다고 했지만 내적으로는 엄격하게 언행을 통제하고 감시했습니다. 우리들은 대한민국 국군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송환의 기대는 접게되고 광산지대에 정착해 아이들을 낳고 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사람다운 대우를 받으려면 당원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일을 잘 해서 당원이라도 되어야 내 자식들에게 체면유지도 되고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죠.

전: 그런데 1975년 7월 4일. 7.4공동성명을 발표한 날인데요. 그때 국군포로 광산노동자들이 마치 조국통일이 멀지 않은 것으로 기대해 남한 고향에 갈 수 있겠다고 기뻐했었다죠?

: 그렇죠. 북한에서는 이후락이란 남한정보부장이 제일 나쁜놈이라고 욕했었는데 그 사람이 북한에 와서 회담을 하고 7.4공동성명이 나오니까 언젠가는 고향 갈 날만 기다렸던 남한출신 국군포로들은 ‘아, 이제는 우리가 남한에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오는가보다’ 라고 기대했죠. 우리 생각이 어리석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런 기대를 많이 했었습니다.

전: 그런데 유 회장께서는 그 당시 측량부 기술자로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기술과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쓰셨습니다. 그래서 큰 상이 내려지곤 했지만 그 상은 늘 고급간부들이 다 차지하고 정작 본인은 작은 훈장과 공로메달 여섯 개 밖에 받은 게 없다고 하셨는데요.

: 제가 북한에서 어머니와 동생 넷을 만난 이후 ‘이제는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는 북한에 살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왕 북한땅에서 살자면 인정을 받아야 하겠는데 그러자면 기술도 배우고 작업장에서 잘 보여 모범노동자가 되고 당원도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원이 되면 동생들에게도 이익이 되고 그 아이들이 발전할 거라고 생각했죠. 열성적으로 일하고 시키는대로 성실히 잘 했습니다. 동생들도 광산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내 신분이 국군포로이다 보니 그 사람들은 나를 공정하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내가 열심히 한 일을 봐서 작은 메달과 훈장을 주긴 했지만 당원으로는 결코 받아주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생들도 군대에 나가지 못했고 당원도 될 수 없었습니다. 북한은 말로는 우리들이 북한공민이라며 동등히 대우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포로신분의 차별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전: 60세에 정년퇴직을 하셨는데 1990년이었죠?

: 그렇습니다.

전: 그래도 공로자로 인정받아 퇴직해서 어느정도 특별 대우를 받으셨다고 했는데, 그것도 식량난이 시작되면서 끊겼다죠?

: 네. 당시 공로자에게는 퇴직하면 일반주민보다는 식량이나 연금을 조금 더 많이 줬습니다. 하지만 식량난이 시작되고 배급제가 붕괴되니까 공로자에게 우대하던 배급도 제대로 못 주고 봉급도 제대로 안줬습니다. 물가도 크게 올랐습니다. 북한 물가는 모두 국정가격을 매겨 정한 것이라서 물품 수요는 많은데 생산이 못 따라 가니까 물가가 상승했습니다. 신발을 예로 들면 신을 살 사람은 100명인데 생산은 열 켤레에 불과하니 그 신발은 모두 고급 간부들에게만 차례가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시장에 가서 비싼 가격에 사야할 형편이었습니다. 당시 내가 받았던 돈이 56원이었는데 만일 국정가격대로라면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 갖고 실제 시장에 가면 쌀 1키로그램도 못 사고 신발 한 켤레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전: 1990년대 들어 식량난이 악화되면서 굶어죽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는데요. 1994년 3월 사랑하던 아내가 굶주리고 병들었지만 약을 구하지 못해 결국 숨졌다고 쓰셨는데 당시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 그때 작은 집 한 채가 있었지만 그나마 불타고 난 뒤에는 실제 하루나 이틀치 식량을 준비하지 못한 때가 많았습니다. 그것도 입쌀을 먹겠다는 게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강냉이 옥수수같은 것만 있어도 좋았는데 그것마저도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나마 그 당시 제가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동생 중에 막내 여동생이 농장에 시집을 간 덕이었습니다. 당시 농장에서는 알곡을 생산하고 농작물을 다루는 일을 하다보니 일반사람들 보다는 굶어죽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동생네를 찾아가 죽이라도 끓여 먹을 강냉이 몇 킬로그램이라도 간신히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두번이지 동생네도 먹고 살기 바쁜데 계속해서 거기 도움을 빌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힘들었던 얘기를 다 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저도 살아 보자고 악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되더라구요.

전: 식량난이 악화된 가운데 간부들 사이에서는 온갖 부정행위와 비리와 뇌물거래가 판을 쳤다고 하면서 ‘안전원은 안전하게, 당 간부는 당당하게, 보위부는 보이지 않게 해 먹는다’라는 비꼬는 말이 있었다고 쓰셨는데 당시 그런 부정행위가 얼마나 성행했었나요?

: 사소한 비리는 북한 어느 곳에 가든지 있었습니다. 안전원은 한국식으로 말하면 경찰인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일을 안 나가는 사람들이나 여행증 없이 차를 몰래 타는 사람들, 그리고 여러 좀도둑 등 경범죄자들을 체포할 권한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둬 놓고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해 먹는 것이었죠. 경찰서 마당에 몇 십명씩 구금한 뒤에 자기들 농사일을 대신 해 주는 농사노동력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각자 집에서 밥을 만들어 와 바치라고도 하고. 또 불법행위 주민들은 이들에게 뇌물을 쓰면서 봐 달라고 부탁하고. 안전원이 하는 이런 비리들을 주민들이 간섭할 수 없으니 ‘안전하게 해먹는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또 ‘당원들은 당당하게 해먹는다’는 말은 젊은 청년 처녀들은 당원이 되어야 체면을 유지하고 사람값을 하니까 당원이 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 간부들에게 아첨하고 뇌물을 많이 줍니다. 당원 한 번 되면 팔자 고치는 셈이니까요. 그러니까 당 간부들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들어오는 뇌물을 당당하게 받습니다. 또 ‘보위부원들은 보이지 않게 해 먹는다’는말은 보위부가 간첩잡는 기관인데 간첩이 아니더라도 소소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일단 보위부에 끌려가면 보이지 않게 뇌물을 바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관 사람들이 제일 잘 살았죠.

전: 그런데 1994년 여름 김영삼 남한 대통령이 8.15 전후해서 김일성 주석을 방문한다는 소문이 나자 국군포로 출신들이 또 한번 기대가 컸었다죠?

: 그렇죠. 저희 포로들은 국군의 본분과 조국에 돌아가는 걸 잊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기회만 있으면 기대하게 되는 것이죠. 김영삼 남한 대통령이 온다면 북한에 몇 만명의 국군포로가 있다는 걸 알테니까 송환요구를 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고향에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전: 2000년 7월 27일, 남북정상회담 열린 지 한 달이 지나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탈북을 시도해 성공하셨는데 당시 만 70세였습니다. 많이 쇄약하셨다는데 어떻게 탈출할 결심을 하게 됐습니까?

: 더 있다가는 쓰러져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신적으로는 기동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보따리 장사 한 사람이 탈북시켜주겠다고 해서 따라 나섰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탈북하는 동안 연명을 보장하겠다고 했어요. 27일 두만강 무산에 다다를때까지 나를 먹여 살렸지요. 기진맥진하긴 했지만 당시 기동할 기력은 조금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다가 죽으면 죽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전: 목숨 걸고 탈출해 중국에 도착한 후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들으셨다던데.

: 네. 그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 탈북을 도와준 보따리장사의 말이 중국에 가면 한국사람이나 중국사람이 자유롭게 왕래를 하고 있다고 해서 일단 중국에만 들어가면 한국에는 쉽게 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비자니 여권이니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건 생각도 못했습니다. 헌데 와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한국에 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브로커 중개인들이 나타나 한국에 가고 싶으면 훗날 입국 중개 비용을 물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국에만 보내주면 그 비용은 보상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내가 국군포로라면 한국 정부가 무심하지 않게 보상을 해 줄 것이라고 귀뜸하면서 내게 한국 고향 주소를 물었습니다. 살던 곳을 알려줬더니 그 사람들이 한국에 알아 봐서 일주일 안에 제 가족의 소식을 전해 줬습니다. 한국에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고 배다른 동생들도 서울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동생과 전화를 연결해 줘 얼굴도 모르는 동생과 통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생이 한국 국방부에 제 말을 토대로 확인을 해 봤다고 합니다. 아버지 말은 형님이 전쟁 중에 전사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내가 북한에서 살다 탈출했는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국방부에서는 전시 중에는 죽진 않았지만 전사자로 처리된 일이 있다면서 직접 형님을 만나 확인해 보라면서 중국에 가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 온 동생과 만나게 됐고 주중 한국 영사관을 거치지 않고 동생과 함께 항공편으로 직접 한국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2000년 8월 30일 탈북 한 달만에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전: 아버님과 공항에서 재회를 하셨다죠. 연세가 몇이셨습니까?

: 93세였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오셨습니다.

전: 알아 보시던가요?

: 재회 순간은 몰라 보셨습니다. 치매기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또 제 동생들도 아버님을 모시고 나올 때 아들이 돌아 온다고 하지 않고 그냥 놀러 나가는 식으로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저를 보시면서도 내가 누구인지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집에 가서는 저를 알아 보셨습니다. 어떤 때는 정신이 돌아 오시곤 했습니다.

전: 다행인 것은 아버지께서 큰 아들을 보고 6개월만에 타계하셨다는 것이죠.

: 그렇습니다.

전: 유 회장님처럼 탈북해 한국에 가신 분도 있지만 탈북에 실패한 분도 있고 탈북했다가도 중국에서 잡혀 강제북송 당한 분 등의 여러 사례를 책에 기록해 놓으셨는데 그 중에도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분들의 사례 한 두가지를 소개해 주시죠.

: 한만택이란 분은 중국으로 탈출해 친척까지 만났다가 북한으로 강제송환됐습니다. 정상운이란 분은 신문에 보도가 많이 됐었는데 국군포로로 확인이 됐지만 중국에서 강제 북송됐습니다. 또 어떤 분은 탈북해 한국에 갈 수 있었지만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돈이 없어 모실 수 없다고 해서 북송되는 도중에 자살을 했습니다. 또 귀환한 포로들의 말을 들어보면 북한에 아직 남아 있는 포로들은 물론이고 탈북하려다 잡혀 처참하게 처형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 6.25국군포로가족회 회장으로서 회고록 마지막 부분에 북한에 생존한 국군포로 문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밝히셨습니다. 그 하나는 국군포로의 무조건 송환보다는 포로 각자의 자유의사를 존중하자, 또 하나는 국군포로의 빈약한 생활체제에 관심을 돌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남북한 당국에 대한 건의로 보이는데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 내가 무조건 송환을 요구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 국군포르들은 이제 80대가 다 됐습니다. 포로 시절 처음에는 무조건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60여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들, 손자까지 있는데 만일 이들만을 송환한다면 80대 노인 혼자 남한에 와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돈 백억을 준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입니다. 나야 북한에 아들 딸 손자가 없고 형제도 죽어 그런 처지가 아니지만 아들딸과 손자가 있는 다른 포로들은 북한에서 가족들과 여생을 같이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남한에 오면 새로운 이산가족이 되는 셈이지요. 그뿐아니라 여기에 와도 이미 부모나 형제들이 다 죽은 사람들은 만나 볼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북한이 합법적으로 가족들과 함께 모두 남한에 송환해 주겠다면 이들은 오겠다고 하겠지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무조건의 송환을 요구하기 보다는 본인의 의사를 물어봐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북한에 자녀 손자가 있지만 본인이 남한에 오길 원하는 사람은 물론 송환해야합니다. 빈약한 포로들을 도와주자는 얘기는 현재 남한에서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에 지원을 하고 있는 터에 과거에 북한이 부려먹은 남한 포로 출신들에 대해 별도로 남한에서 지원을 하면 좋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북한이 남한과 화해협력 차원에서 그런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 출신들에게는 그들 몫으로 남한의 물자공급을 우선적으로 해 주도록 하자는 제안입니다.

전: 그밖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북한은 말로만 동족이요 민족끼리요 평화요 하지 국군포로문제에 대해 하는 일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국군포로들은 북한에서 시키는 대로 죽도록 일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60세 넘어 더 이상 부려먹을 수 없게되자 북한은 폐기물처럼 버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여비를 줘서 남한으로 보내지는 못할망정 백발 노인이 다 된 이들이 남한에 가는 것을 잡아 처형하고 중국까지 간 사람을 송환해 처벌하는 건 잘못된 겁니다. 죽을 날이 며칠 안 남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고향에 가서 묻히겠다는 데 그게 무슨 죄라고 그들을 붙잡아 갑니까? 그뿐아니라 두만강 건너 중국에 간 포로 출신들의 북한 내 가족까지 잡아서 정치범수용소에 끌어 가느냐는 겁니다. 여기 남한에서는 장기수들을 북에 보냈는데도 말입니다. 한국정부에도 할 말이 있습니다.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두번이나 평양에 가서 몇 안되는 납북자들을 데려왔는데 왜 한국은 장기수를 북에 보내주고도 국군포로 한 명도 데려오지 못하는 겁니까? 말로만 국군포로 송환은 한국정부의 책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젊은이들의 국방의식에도 영향을 줄 겁니다. 앞으로 6.25같은 전쟁이 나면 젊은이들이 기꺼이 전쟁에 나서려 하겠습니까? 6.25 국군포로송환에 힘쓰지 않는 정부가 내가 만일 전쟁포로가 된다면 나를 송환시켜 줄 것인지 의심할 겁니다. 현역군인들의 국가안보나 정신무장을 위해서도 한국정부는 포로문제를 적극 해결해야 합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50년동안 국군포로로 살다가 나이 70에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귀환한 유영복 씨로부터 그가 탈북 11년만에 펴낸 회고록 ‘운명의 두날’에 관한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