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철없던 나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7.01.31
lunch_hanawon-620.jpg 국회 외통위 소속 의원들이 하나원 내 교실과 병원을 방문한 뒤 구내식당에서 탈북자들과 함께 점심을 함께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아무리 힘들었던 시간이라도 지나놓고 보면 나쁜 기억은 희미해 지고 그저 추억으로 남습니다. 남한생활이 10년 이상 탈북민들에게 자신의 고향인 북한은 그런 추억 속 한 부분으로 기억되는데요. 오늘은 회사를 다니면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황금희(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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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희: 세월이 흐르고 생각도 많아지고 나이를 먹으니까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그때처럼 살라고 하면 못살 것 같아요.

함경북도 장흥이 고향인 황 씨는 탈북 당시 자신에 대해 “그때는 단순하며 철없고 용감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도 중국으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삼촌과 두만강을 건넜던 날을 기억합니다.

황금희: 제가 2001년에 북한을 떠났는데 그날따라 비가 너무 많이 왔어요. 엄마가 잘 다녀오라면서 마지막 도시락을 싸주셨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때 저희가 닭을 키우고 있었는데 비닐 봉지에 계란 여섯알을 싸주셨어요. 닭이 많이 귀하긴 했는데 이틀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한끼에 한개씩 먹을 수 있도록 어머니가 준비를 해주신 것 같아요.

중국에서는 오래 지내지 않고 바로 남한으로 가게 되는데요. 황 씨가 스무살 나이에 보게 되는 세상은 자신이 그동안 보아온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황금희: 남한에서 처음 인상이 하나원을 나와 거주지 배정을 받고 나왔는데 배정지가 서울이었어요. 그때 충격을 많이 받았는데 자동차들이 주차한 것처럼 많아서 놀랐고 빌딩이 북한보다 많고 높아서 놀랐고 북한보다 풍부한 먹을꺼리, 다양한 식당이 많아서 놀랐어요.

남한에 가서는 북한에서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마음껏 해보자고 마음먹고는 제일 먼저 한 것이 자신의 나이 또래 남한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황금희: 저는 북한에서 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못 갔어요. 그래서 무조건 대학부터 가고 싶었어요. 하나원에 있을 때 선생님이 나이도 어리니까 대학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도 해주셨고요. 그래서 대학을 가는 방법이 어떤 것이 있을까 해서 많이 물어도보고 정보를 얻어서 대학을 무조건 갔어요. 하나원 나와서 대학에 입학하고 4년동안 꾸준해 공부만 했어요. 그런데 졸업하고 취업하려는데 마땅히 취업할 곳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과연 어떻게 하면 취업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전공을 살려 대학원에 가서 좀 더 깊이 공부를 하면 나중에 좋은 취업지가 나오지 않을까해서 무조건 대학원 또 갔어요.

세상에 제일 쉬운 것이 공부라는 말도 있지만 북한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해서 남한 대학 공부를 하자니 어려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문제는 생활비였습니다. 대학등록금은 정부 지원으로 해결됐지만 그외 비용은 자기가 벌어서 충당을 해야 됐기 때문입니다.

황금희: 제가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고기굽는 일을했어요. 학교 2시에 끝나면 식당에 가서 고기굽고 밤 10시에 끝나고 집에오는 그런 시간을 4년 보냈어요. 돈을 모아서 책도 사서 보고 나름 문화생활을 했어요. 아르바이트도 밤늦게까지 하니까 몸이 피곤해서 공부하는데 지장이 있어서 다른 일도 찾아봤지만 아무튼 식당일을 했었어요.

학교 공부를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생활환경이 틀려서 오는 것이었는데요. 지금 생각해봐도 얼굴이 화끈 거리는 남한정착 초기의 기억은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황금희: 처음에 문화 차이는 외래어 때문에 느꼈는데 한국은 보니까 간판들이 한국어로 써놓기는 했는데 그냥 영어 발음을 그대로 한글로 옮겨 써놔서 무엇을 말하는지 저는 전혀 몰랐어요. 예를 들어 파리바께트, 맥도널드, 던킨 도너츠 이런 간판만 보면 뭘 말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거든요.

그러면서 황 씨는 지워지지 않는 경험담 하나를 들려줍니다.

황금희: 서울에 보면 대학로가 있는데 제가 친구들과 놀다가 화장실을 가야했어요. 그날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요. 보통은 화장실을 가면 남녀 그림이 표시로 돼 있는 것만 저는 항상 봤었어요. 그런데 그 화장실은 왠지 모르게 그림이 없고 영어로만 써있더라고요. 저는 처음에 영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그림이 없어서 남녀공용 화장실인줄 알았어요. 볼일을 마치고 나왔는데 화장실에 남자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왜 나를 다 쳐다볼까 했지만 아무 생각없이 나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던 거예요. 그것도 그날 확인한 것이 아니라 한참 시간이 지난다음 그 건물을 지날 일이 있어 갔는데 그때 제가 남자 화장실을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일이 한 번 있었어요.

공공장소에 있는 화장실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데 영어로 남녀 화장실 표기를 달아놨으니 그것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낭패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죠. 황 씨는 그런 정착초기의 혼란을 경험하면서 4년을 지냈고 북한으로 하면 준박사과정인 대학원에 진학합니다.

황금희: 대학원 합격자 발표나고 굉장히 뿌듯했어요. 왠지 뭔가 전문가가 될 것만같고 대학원이라고 하는 배울 수 있는 울타리에 속해 있다는 생각만 하면 지금도 대학원을 다니고 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처음 받았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 행복하고 앞으로 대학원에서 많이 공부하고 연구도 많이 해서 전문가가 꼭 되겠다는 그런 느낌도 받았고 아무튼 좀 더 저의 부족한 점을 채울 수 있는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회사원 황금희(가명) 씨의 남한정착초기 과정을 전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이후의 이야기 들어봅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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