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터져도 남한이 좋은 이유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4.06.03
truck_drivers_rd-305.jpg 충남 내포신도시를 오가고 있는 덤프트럭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주민은 남한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반은 북한보다 잘 산다 나머지 절반은 못 먹고 굶주린 사람이 많다. 이정도로 극과 극으로 갈릴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요. 탈북자 이호(가명)씨는 북한에서보다 노동의 강도는 심하지만 남한 생활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이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함경북도 출신으로 이제 40대 중반을 넘어선 이호 씨가 북한을 떠난 것은 1990년대 말입니다.

이호: 저는 97년에 북한에서 나왔어요. 그때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해서 어려웠어요. 시장 길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데 가마니로 덮어놓고 사람들은 그 시체를 넘어 다니고 그랬죠.

살아남기 위해 고향을 떠났고 중국에서의 5년 생활을 거친 후 한참 탈북자의 대거 남한입국이 이뤄지던 2002년 이 씨도 어렵게 서울 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때 이 씨의 나이 33살.

이호: 도착했을 때 인천공항이랑 공항고속도로를 보고 북한하고는 상대적이라고 느꼈죠.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목표가 뚜렷이 없었죠. 왜냐하면 살아온 체제가 틀리기 때문에 덤덤하게 왔습니다. 처음 와서는 피자집 배달도 해보고 건설현장 막노동 노가다도 해봤습니다. 일부러 힘든 일을 찾아했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회사에 취직해서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를 것이라 생각했어요. 통근시간이 지하철 타고 출근 1시간 반, 퇴근 1시간 반 걸렸고 집에 들어오면 밤 11시가 넘었죠. 그래도 한국생활이 참 좋았어요. 북한에서는 아무리 일해도 국가에서 배급을 주고 정해진 월급을 타는데 그 월급 가지고는 쌀 1킬로도 사기 어려운데 남한에서는 일한만큼 버니까 좋더라고요.

누군가 말하기를 탈북자가 남한에 가면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과장이 심하거나 또는 뭔가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 탈북자에게 큰돈을 주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릴 수도 있는데요. 정부에서 일정금액 정착지원금을 주고 아파트를 준다는 것은 맞지만 일하지 않았는데도 북한식 배급을 주진 않습니다. 그래서 정착 초기에는 보통 탈북자들이 힘들게 막노동을 하는데 이호 씨도 그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호: 노가다 일은 새벽 5시 반에 나가서 오후 5시면 끝납니다. 그런데 피자집은 식당이라 10시 출근해서 밤 10시 퇴근 이예요. 그러니 집에 오면 11시 반이 넘어요. 북한에 비하면 힘들죠. 북한은 나가서 시간만 채우면 월급이 나오고 배급이 차려지거든요. 북한에서는 일을 많이 해도 돈을 더 준다거나 그렇지 않고 똑같은데 남한은 한만큼 주니 그게 좋더라고요.

2010년 경 이후부터 동반 탈북에 이은 남한으로의 가족입국이 늘면서 탈북자들은 대부분 혼자가 아닌 상태에서 남한생활이 시작됐지만 2000년 초기만 해도 단독 입국이 주를 이었고 이 씨도 혼자였기에 힘든 점이 많았습니다.

기자: 남한에서 대학도 보내주고 하는데 어떻게 바로 일을 하셨나요?

이호: 대학에 가라는 분도 많았지만 그때는 30살이 넘으면 일해서 돈을 벌어 북에 있는 일가친척을 도와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가족단위로 탈북 해 남한에 오니 대학을 가는 것이고 그때는 혼자 와서 벌어서 북에 있는 일가친척 돕고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브로커비용을 마련해서 우리 가족을 데려와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일을 했죠.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브로커를 사서 북한 가족 3명을 남한으로 부릅니다. 그래서 돈이 더 필요했던 건데요.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돈을 모으자면 안 쓰고 안 먹고 그냥 일만 하는 것이 최선이었죠.

이호: 용접학원도 다니고 트럭 운전을 했습니다. 5톤 트럭을 몰아서 월 320만 원 정도 벌었습니다. 힘들었는데 집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밥 먹고 나가서 저녁 7시가 되어야 들어오고. 늘 코피가 나서 나중에는 코 안이 헐어서 밤에 잘 때는 코로 숨을 못 쉬고 입으로 숨 쉬고 하면서 힘들었지만 돈을 제일 많이 모았던 때입니다. 어디 나가서 뭘 사고 싶어도 살 시간이 없으니 돈을 모을 수 있었어요.

이제 남한생활이 12년이 됩니다. 북에 계신 어머니도 모셔왔고 동생들도 데려왔습니다. 또 열심히 일한 덕에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됐는데요. 그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땀 흘린 덕분에 정부에서 탈북자에게 준 임대아파트가 아닌 자기 집도 가질 수게 됐습니다. 이젠 주변을 돌아보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죠.

이호: 여름에는 쉬는 날 벚꽃축제 보러 여의도에도 가고 텐트를 사서 차에 싣고 캠핑을 갑니다. 바다에 나가 해수욕도 하고 계곡에 가서 고기도 잡고 이렇게 2박 3일 즐기다오고요. 겨울에는 스키도 타러가고 때로는 겨울바다 보러 강원도도 가고 합니다. 예전에는 잔돈 500원도 아끼느라 지하철에서 목말라도 안 사먹고 집에 와서 물먹고 그랬는데 지금은 여유를 갖고 여가 시간을 즐겨야겠다 하고 휴식을 즐깁니다.

이호 씨는 말합니다. 남한에 가서 뭐가 제일 좋은가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알게 됐다고 말입니다.

이호: 저는 북한에 있을 때 사람만 뭔가 보이지 않는 뭔가를 찾는 심리 때문에 점쟁이도 찾아가고 했는데 남한에 와서 보니까 꼭 만나야 할 분이 하나님이더라고요.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만 신처럼 하나님처럼 모든 사람이 모시고 따르고 하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인간이 만나야할 분이 하나님이더라고요.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신앙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도 있고 행복도 누리고 또 인간으로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남한에 와서 느꼈습니다. 북한에서는 내가 소중한 존재인 것을 몰랐고 오직 수령을 위해서 태어난 존재인줄 알았었습니다. 내 스스로가 소중한 존재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남한에 와서는 그것을 많이 느끼고 살아갑니다.

딸 둘을 키우는 한집안 가장인 이호 씨는 현재 건물 시설관리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건물에 난방기나 수도, 전기 등 시설이 고장 나면 수리를 하는 기술자인데 남한에서는 모든 것을 기계로 하니까 손으로 하는 일은 북한 사람이 훨씬 잘한다며 직장에서도 인정받고 생활한다고 합니다. 그런 이 씨에게 꿈이 있다면 차를 몰고 아이들과 함께 고향을 다시 가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호: 계획은 저는 빨리 통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향수병이 있더라고요. 인생 끝나기 전에 고향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어요. 통일이 돼서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다시 그 땅의 그 체제 밑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통일이 돼서 남북이 하나가 된 조건하에서 내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거죠.

제2의 고향 오늘은 이호 (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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