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부르며 살리라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7-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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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청년중앙회관에서 공연하고 있는 청년중앙예술선전대 모습.
평양 청년중앙회관에서 공연하고 있는 청년중앙예술선전대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살면서 여러 직업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직업이란 것이 먹고 살기위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갑지기 숨이 탁 막혀 옵니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즐긴다. 꿈을 이루는 것 같다라고 말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오늘은 바로 그런 사람을 소개 합니다. 탈북 여가수 최예라 씨입니다.

최예라: 흘러가는 뜬구름은 바람에 가고….

1970년대 남한 대중가요를 주름잡았던 대표적인 남자 가수가 나훈아 입니다. 최예라 씨는 방금 사나이의 눈물이라는 노래를 한소절 들려줬는데요. 최 씨는 북한에 선전대에서 활동하던 분입니다. 최 씨의 탈북은 강산이 변한다는 10 세월을 두 번 지난 즈음입니다.

최예라: 저는 1999년 중국으로 탈북했습니다. 저는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신성분으로 지방으로 소개된 것이 아니라 아빠는 당에 너무 충실한 사람이었는데 윗사람들에게 잘못 보여서 지방으로 쫒겨 갔습니다.

기자: 탈북 벼경은 뭔가요?

최예라: 그때는 북한에서 김정일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아사자가 많았습니다. 먹고 살고 힘들었기 때문에 탈북한거죠.

최 씨는 그리고 중국에서 10년이 넘게 살다가 남한으로 갑니다. 중국이 좋아서 그곳에 눌러 살았던 것은 아니고요. 사정이 있었습니다.

최예라: 저는 한국이 북한보다 못사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중국에서 10년 살면서도 한국에 대해 많이 듣지 못했어요. 그런데 친구가 2008년에 한국에 갔는데 한 번 중국에 들어왔더라고요. 한국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중국에 살던 북한친구 몇 명이 한국에 갔는데 한국이 좋다고 해서 나도 가야지 하고 왔어요. 그때 돌반 지난 딸을 데려왔는데 처음에는 너무 정착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한국에 오길 잘했구나 한국이 좋다는 것을 알았죠.

시간이 지나면서 뭐가 변했기에 힘들게 느껴지기만 했던 남한이 좋아보였을까요? 그것은 주변환경에서 온 것이 아니라 최 씨가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던 겁니다.

최예라: 하나원 거쳐 집에 왔는데 소금, 간장 하나 없는 상태였어요. 혼자 내가 여길 왜 왔지? 중국에서는 여기보다 잘살았는데 이랬어요. 그러다 애길 업고 아파트 밖으로 나가 보니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고 하니까 한국이란 곳을 알게됐습니다. 너무 좋고 해서 중국에서 10년을 내가 왜 살았던가 싶으면서 한국 내가 빨리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어요. 눈에 보인 세상이 천국이구나 했어요. 북한에서 잘사는 사람은 잘살지만 여기가 좋은 이유는 못사는 사람도 사과를 먹을 수 있고 귤을 먹을 수 있고 바나나를 먹을 수 있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출신성분에 상관없이 할 수 있잖습니까? 여기는 정말 자유더라고요. 법대로만 살면 정말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한국이더라고요.

남한에서의 자유란 무조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무한자유가 아닙니다. 최 씨의 말처럼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받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서로 존중하고 지켜야할 것들을 준수하는 법이 정해놓은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최 씨는 탈북자에게 지원하는 정착금이나 의료보험의 혜택과 함께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하게 됩니다.

최예라: 한국에 오니까 좋은 점이 탈북자는 공부하게 혜택을 주더라고요. 제가 간호학원에서 조무사 자격증을 땄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고, 대학을 2년 다녔고 나중에 앞이 보이더라고요. 지금은 아이가 7살입니다.

중국에서 낳아서 아직 잘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남한에 간 탈북여성이 꽤 있습니다. 이런 경우 아이들 누가 돌봐줄까? 일은 해야하는데 이런 현실적인 걱정을 하게 되죠. 그런데 최 씨는 어떻게 육아와 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는지 들어보죠.

최예라: 아침 9시에 학교가서 간호학원서 공부를 하고 아이를 어린이 집에 맡겼고 4시에 공부 끝나면 아이 데려오고 이러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기자: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비용은 나라에서 지원했습니까?

최예라: 네 그렇죠. 한살이 지난 아이를 데려와서 이유식도 안먹이고 기줘기도 안찼어요. 아이를 어린이 집에 데려다 놓고 공부를 하고 학원 마치고 데리고 오고 그랬습니다.

낯선 곳에서 홀로 정착한 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이 낯설지만 습관이나 관습 등으로 현지인들과 충돌이 많이 생기고 그로인해 자신은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이 또한 해결 됩니다.

최예라: 남한 말을 써야 하는 데 저는 북한 억양을 쓰니까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하는데 북한말투가 변하지 않는 것이 정말 두려웠습니다. 북한 사람만 만나다 보니 남한정착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남한 지인이 북한사람보다 한국 사람을 많이 대상하고 모임에 많이 가라 그러면 정착이 빠를 것이라고 알려주더라고요.

39세에 시작한 남한생활. 최 씨는 남한과 북한에 모두 살아본 사람으로 남북한 사람이 사람을 대상하는 차이가 뭔지를 꼭 찍어서 말합니다.

최예라: 한국 사람들의 장점은 그럴 수 있다. 사람 사는 것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해야한다 말하고 헤쳐나갈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북한사람은 원래 그런앤데 하고 자기 마음대로 상대를 평가합니다. 왜냐하면 호상비판, 생활총화 이런 것을 하면서 살아서 사람을 딱 평가해버립니다. 그 사람이 틀리지 않았어도 사람을 평가해주는 겁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찾은 남한에서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지만 대학공부를 하게 도움을 줬고 갓난아이였던 딸아이를 키울 수 있었기에 모든 것이 고맙다는 최예라 씨. 2년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꿈인 가수활동을 하면서 공연을 다니고 있습니다.

기자: 북한예술단에 소속돼 있습니까?

최예라:네, 예술단 활동을 하면서 개인적으로도 남한 가수분들과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 노래도 부르고 남한 노래도 부룰 수 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부터 성악을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성악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그리고 아직 아이들이 어립니다. 큰아이가 17세 둘째가 10살입니다. 그러니까 시집보내는 것까지는 생각을 안했고 대학보내는 것까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민 가수 최예라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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