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1:7의 전설

대학생들이 낙엽이 떨어진 캠퍼스 거리를 걷고 있다.
대학생들이 낙엽이 떨어진 캠퍼스 거리를 걷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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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3만 여명의 탈북자가 남한에 사는 것으로 통일부는 집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었고 남쪽에선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느라 혼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소위말해 남한생활이 장밋빛 꽃길은 아니란 건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의 행복을 차근차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춘천에서 벌어진 1:7 전설의 주인공 김주형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주형: 제가 인민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내가 자고 있었는데 엄마가 아무 말도 않고 중국에 가신 거예요. 1년 반 있다가 엄마에게 연락이 와서 오겠는가 물어봐서 제가 망설임 없이 바로 가겠다고 하고 두만강을 새벽에 건넜죠.

13살에 탈북한 김 씨는 중국에서 7년을 살다 결국 신변안전이 보장되는 남한으로 갑니다. 그때는 벌써 김 씨가 청소년의 시기를 훌쩍 넘긴 나이였죠.

김주형: 제가 20살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인데 대학을 가려고 하면 검정고시를 보던지 해서 졸업장이 있어야 하는데 원래 1학년이면 한국에서 17살인데 학년 문제로 교장선생님과 상담을 했어요. 선생님은 3학년으로 가서 1년 공부해서 대학가라고 했는데 저는 워낙 기초가 없고 하니까 대학을 가도 공부하기 힘들 것 같아서 조금 늦더라고 배워서 대학을 가기 위해 1학년에 입학하고 싶다고 부탁 했어요.

전설의 1대 7이란 말은 김 씨가 남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힘들었던 적응 기간에 벌어진 사건을 근사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학교에서 일곱 명의 급우들과 싸움을 하게 된 일을 말하는 겁니다.

김주형: 못 참겠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성인이고 급우들은 미성년자잖아요. 참다가 확 터졌던 적이 있어요. 7명과 혼자 싸웠거든요. 혼자다 보니 내가 많이 맞았어요. 피도 흘렸는데 그 과정을 통해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됐어요. 그날 싸우면서 내가 아이들에게 힘 있게 말했어요. 북한에서 죽을 각오로 왔는데 너희가 이런다고 내가 무서워할 것 같냐? 3년 동안 무사히 졸업해야 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무시할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내가 나이 많다고 해서 티내며 대접하라고 하진 않겠다. 그러니 서로 무시하고 살자 했죠. 너희가 7명이니 싸움에서 이기겠지만 나는 무섭지 않다. 이런 식으로 얘길 하니까 그중 젤 나이가 많은 아이가 형님 죄송하다고 우린 몰랐다 이랬어요.

그날 집에 와서는 너무 분하고 맞은 것이 아팠어요. 그냥 학교를 자퇴할까도 생각했는데 옆방에서 자고 있는 엄마를 생각하니까 못하겠더라고요. 다음날 부은 얼굴로 학교를 갔어요. 생각은 두렵고 아이들이 어떻게 날 대할까 걱정스러웠는데 먼저 나에게 와서 인사도 해주고 깍듯이 대해줬어요. 그래서 졸업을 무사히 할 수 있었어요.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보통 아이들보다 3살이나 많은 사람이 같은 학급에 있으니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다른 아이들이 그것을 트집 잡아 텃세를 부린 거였습니다. 순수한 아이들인지라 한 번 싸움을 하고는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얘깁니다. 지금은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과거가 됐지만 김 씨에게는 정말 커다란 사건 춘천에서의 전설의 1대 7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기자: 현재 어느 대학 무슨 과 학생입니까?

김주형: 현재 국민대학교 중어중문과 2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기자: 남한의 대학교 다닐 만 합니까?

김주형: 제가 북한에서 대학을 경험하진 못했는데 한국에서 대학은 많은 사람이 가고 싶어 하잖아요. 나중에 취업하려고 해도 대학졸업장이 있어야 하고요. 다니다 보면 물론 단점도 있지만 좋은 점이 더 많은 것이 좋은 친구도 만나고 하고 싶어 하는 것도 해보고요. 대학을 안 갔다면 돈 버는 것밖에 없는데 대학을 졸업하면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생기니까 좋고. 친한 친구에게는 내가 북한에서 왔다고 말하고 허물없이 지내고 있어요. 대학생활은 재밌어요. 정말 살맛났어요.

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요즘은 학기 중이라 공부에 열중하고 있지만 금요일 오후부터는 여가생활을 즐기며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일을 돕습니다.

김주형: 동아리 활동은 친구들과 매주 축구도 하고 다른 학교 친구들과 모여 독서모임도 해요. 한 달에 책 한권을 읽고 토론하는 거죠. 주말에는 부모님 계신 춘천에 가서 일도와 드리고 용돈을 받아서 생활비로 쓰고 있어요.

북한에서는 인민학교에 잠시 다녔고 중국에서 7년 동안은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고작 남한에 가서 대학진학을 위해 3년 공부했는데 과연 대학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는지?

김주형: 수업 듣다 보면 막막할 때가 많아요. 중국어는 내가 거기에 오래 살았으니까 잘 따라갈 수 있고 한데 영어는 한국에 올 때 알파벳도 모르고 고등학교를 들어가서 하나도 몰랐거든요. 지금 수업에 영어 원주민 교사가 들어오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옆에 친구에게 항상 물어봐야 해요. 기초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다른 언어가 있어서 그런 언어가 생소하죠. 일단 알아들어야 문제를 푸는데 알아듣지 못해 힘든 점이 있었어요.

뭐든 남들보다 힘이 더 든다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부족한 만큼 더 열심히 공부하니 학교 수업은 따라갈 수가 있답니다. 이렇게 대학에서 공부하는 자신이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되기도 한데요. 특히 북한의 친구들이 생각날 때면 그렇답니다.

김주형: 북한에서 살았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자주 했어요. 고등학교 때 특히 그랬는데 꿈에 친구들이 나타나고 그랬어요. 거기 있었으면 친구들 군대 가는 것도 배웅하고 했을 텐데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이런 생각도 했고요. 아빠도 많이 보고 싶었고요.

김주형 씨의 꿈은 아주 소박하지만 모든 사람이 꿈꾸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김주형: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중국어 관련 무역회사에 취직을 하는 거예요. 솔직히 큰 꿈은 없어요. 결혼해서 어느 정도 돈을 벌어서 가족을 꾸릴 정도만 되면 좋아요. 무엇을 하든 옛날보다 너무 좋은 행복한 생활을 하다 보니 만족하고요. 계획이라고 하면 취직을 하기 위해 중국어 자격증이나 영어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어요.

김주형 씨는 오늘도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괜히 수줍은 마음에 엄마 얼굴을 보고 입이 닫히지만 꼭 이 마음만은 전하고 싶답니다.

김주형: 가끔 혼자 엄마에 대해 혼자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때 엄마 입장에서 보면 정말 대단해요. 제가 어릴 때 중국에서 공안 소리가 들리면 자기가 앞에 나가고 나는 숨게 하고 항상 내가 먼저였거든요. 그런 점이 항상 고맙고 미안하기도 하고요. 내가 좀 더 잘 돼서 엄마를 호강시켜드려야겠다. 요즘 들어 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국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김주형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