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교사가 되고 싶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7-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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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남구 신일중학교에서 스승의 날을 맞아 '선생님께 드리는 상장' 수여 행사를 하는 모습.
울산시 남구 신일중학교에서 스승의 날을 맞아 '선생님께 드리는 상장' 수여 행사를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탈북자가 남한에 가서 북한에서 하던 직업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화도 다르고 제도 자체가 틀리기 때문인데요. 북한에서 중고등학교 교사였던 탈북여성은 자신이 학생을 가르쳤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면서 다시 남한에서 교사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양강도 출신의 김지은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지은: 어쨌든 내가 정한 목표를 향해 그 길로 가자 하고 하나하나 이뤄가니까 보람도 있는 것 같아요.

김지은 씨는 2008년까지 양강도 혜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1월달에 교사 강연행사에 참여했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고를 당해 고향 땅을 떠나게 됐습니다. 그때가 27세살 때였는데요.

김지은: 중국말을 알아야 어디가서 일을 하기 때문에 3개월 동안 혼자 중국말을 공부해서 처음 들어갔던 곳이 천진에 있는 공장에서 용접일을 4년 하고 그 다음에 북경 현대차 부품회사에서 일했습니다. 거기서 남한 올때까지 일했습니다.

중국에서는 9년을 살았습니다. 일을 했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은 크게 없었지만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외출을 한다거나 사람을 만나기 보다는 일하고 바로 집에 가서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다람쥐 챗바퀴 돌듯 단조로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2016년 12월 남한행을 하게 되는데요.

김지은: 이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대담하게 사장을 찾아가서 3시간 동안 앉아서 내가 북한에서 중국에 와서 살아가는 과정을 얘기 했더니 사장이 남자인데 마지막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무슨 그런 드라마 같은 말을 하냐는 거예요. 그래서 드라마가 아니고 사실이라고 하고는 처분만 기다렸어요. 저는 그때까지도 한국을 어떻게 오는지도 몰랐고 브로커라는 말도 몰랐어요. 그런데 사장님이 한국 사람을 연결해서 브로커를 알선해줘서 한국으로 오게됐던거죠.

막연하게 한국이 잘사는 나라라는 상상만 하다가 직접 현실을 경험했을 땐 긴장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화려한 것, 부자들의 생활만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일상 생활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마음부터 다잡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김지은: 한국에 와서 보니까 틀린 것이 많죠. 우리가 살아왔던 생활하고 틀린 환경인데 한가지 북한하고 다른 것이 있다면 자기 돈이 없어도 내가 오늘 일을 하면 돈을 벌고 먹고 살수 있는 것은 틀려요. 그리고 공부를 하든 기술을 배우든 해야 한다는 것을 북한에서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직접 와보니까 이 세상에서 살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힘든 과정을 격어야 할지 마음 가짐도 필요하더라고요.

우선 김 씨는 먼저 온 탈북자들을 통해 남한 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요.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답니다.

김지은: 걸김돌이란 것이 솔직히 한국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보는 눈이 좋은 것이 아니예요. 어디를 가서 알바를 하더라고도 당당하게 내가 탈북민이라고 말을 못한다는 거예요. 전부 중국 조선족이라고 말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왜 탈북민이란 사실을 숨기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탈북민이라고 하면 벌써 보는 눈이 이상해서 말을 못한다는 거죠. 저는 진짜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남한에 가서는 모든 것이 생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에 오랜 기간을 살다보니 자연히 북한보다는 중국 물가와 비교가 됐고 살 것은 너무 많은 데 모든 것이 너무 비싸서 손이 잘 가질 않았습니다.

김지은: 대구에 와서 하나센터에서 보름동안 교육을 받았어요. 버스 노선도 배우고 하는데 백화점에 상품권 100만원 짜리를 가지고 가전제품을 사러갔어요. 100만원이라 많은 것을 살줄 알았는데 텔레비전하고 냉장고밖에 못사는 거예요. 무슨 한국 물가가 이렇게 비싸냐고 하니까 판매원이 나를 처다보는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 써야하는 언어가 문제였는데요. 서울 표준말이 아닌 지방 사투리도 김 씨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김지은: 대구 사투리가 듣기가 그래요. 특히 대구 남자들은 이상하게 말을 해요. 그 사람들은 그말이 좋은 말이라고 하는데 내가 듣기에는 안좋은 거에요.

기자: 예를 들어서 어떤 말이 그렇습니까?

김지은: 야, 가시나야 무슨 이런 말을 하는데 그 사람은 욕이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듣기에는 욕으로 들리는거예요.

기자: 일상적인 사투리는 어떤가요?

김지은: 못알아 듣는 것은 식당에서 어른들이 뭘 찾는데 못알아듣겠더라고요. 나중에 나온 것을 보니까 장어찜이었어요.

남한생활 반년이 조금 지날 무렵 김 씨는 생각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무엇인가에 쫓기듯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무엇인가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을 그동안 놓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달은 겁니다.

김지은: 제가 8월에 진짜 갈등도 많고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한국 먼저 온 탈북자 선배가 캠핑을 가자고 하는 거예요. 그때까지 전 텔레비전에서 사람들이 놀러 다니는 모습을 안믿었어요. 얼마나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데 저렇게 놀러 다니겠는가 하면서 안 믿었는데 강원도 놀러를 가서는 진짜 깜짝 놀랐어요. 진짜 사람이 많은 거예요. 인생을 저렇게 살아야 겠다 했죠. 이제는 돈에 쫓기는 인생을 살지말고 남이 하는 것 다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기자: 사람이 많은 것에 놀란 겁니까? 아니면 즐거워 하는 모습에 놀란 겁니까?

김지은: 사람들이 그렇게 즐기면서 산다는 것에 놀란 거죠.

기자: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까?

김지은: 없죠. 저는 북한에서도 출근하고 퇴근하고 중국에서도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밖에는 몰랐거든요.

북한에서 교사였던 김 씨는 남한의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기회를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북한의 생활에 대해 말해 주면서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게 됐고 남한 땅에서 다시 한 번 교사일을 해보자는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 마음의 변화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김지은: 내가 중국에서 9년을 살았지만 매일 출퇴근만 하고 부자처럼 돈을 번 것도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화려하게 살지도 못했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느낀 것이 제2의 인생은 그렇게는 안 산다. 내가 하고픈 것을 하면서 살자 했죠. 그래서 학원에서 집에 오면 밥 먹고 12시까지 공부하고 또 자고 다음날 또 학원에 가고 6개월 동안 자격증도 따고.

이제 다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김지은 씨. 자신이 가장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답니다.

김지은: 저는 진짜 남한에서 다시 한 번 교사로서 학생들을 위해 뭔가 하는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바램도 있고요. 그래도 학생들 앞에서 뭔가 얘기 하고 가르치는 것이 힘들었지만 생각을 해보니까 보람도 있고 너무 좋았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북한에서 교사였던 김지은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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