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향해 전진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4.04.01
counselling_expert_305 '북한이탈주민 전문상담사 양성교육'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
사진-새조위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꿈이 있어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땀 흘려 열심히 하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은 남한생활 8년차인 대학원생 김지연(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30대 초반의 김지연 씨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살다가 중국을 거쳐 남한에 갑니다.

김지연: 저는 2006년도에 북한을 탈출했습니다. 그때는 고난의 행군시기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배급이 일정하지가 않았습니다.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람도 꽤 많았고 꽃제비도  많이 있었고요.

생활이 어려워지자 잘사는 친척의 도움이 필요했고 당시 많은 사람이 그랬듯 김 씨도 중국에 사는 친척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딱 한 달만 다녀오자고 했던 길이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길이 되고 말았는데요.

김지연: 바로 남한에 가지 않았습니다. 중국 친척이 있었는데 1년에 한 두 차례 우리 집엘 왔었는데 북한에 한 번씩 올 때마다 많은 물건을 가져왔어요. 옷, 신발, 돈을 가져 왔었어요. 그 때부터 중국이 잘 산다는 것을 느끼고 호기심을 느꼈던 거예요. 중국에 1년 정도 있었는데 공안에게 붙잡혀서 강제북송될까봐 계속 숨어살고 그랬었거든요.

기자: 1년 만에 한국으로 가자는 생각을 한 계기가 이었나요?

김지연: 중국에 있는 동안 남한의 드라마(토마토, 겨울연가 등)를 많이 보면서 남조선이라는 나라에 호감이 갔어요. 그러면서 남한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에서의 불안한 생활을 접고 제 3국을 거쳐 김 씨는 2007년 남한에 도착합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눈에 선한 모습이 있다고 하는데요.

김지연: 일단 첫인상은 비행기를 타고 남한에 도착했을 땐 우선 공기부터 달랐어요. 중국 보다 훨씬 맑고 상쾌한 기억이 나고요. 인천공항에서 서울까지 오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층 이상의 높은 건물들이 너무 많았던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랐던 것은 제가 타고 있던 차가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길에 차들이 너무 많아서 잘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북조선에 있을 때에는 자동차 보기가 매우 힘들었는데 이곳 남조선에는 자동차가 한 집에 한 대씩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서 자동차로 인한 길 막힘이 자주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도  남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딴 자격증이 운전면허증입니다.

신분이 해결 되면서 강제북송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이제 새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아직 나이도 젊기 때문에 뭐든 닥치는 데로 뭔가 하면서 남한 사회를 배우게 됩니다.

김지연: 제가 처음에 와서는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해봤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시행착오도  있었습니다. 북조선에서의 경험을 살려서 옷을 만드는 봉제공장도 다녔고요. 거기서 시다라는 것도 해보고 기술자가 없을 때는 직접 재봉틀로 옷도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통해 일하는 사무원일도 해봤습니다.

북한에서는 직업을 배치를 해주지만 남한에서는 본인이 직업을 선택을 해야 해요. 자기가 원하는 분야에 기술이 있다면 그 일에 도전할 수 있고 또 그 기술이 부족하다면 학교나 학원을 통해서 기술을 배우는 겁니다. 제가 생각할 때 남한에 잘 왔다고 보는데 특히 학교 교실에 앉아있을 때입니다. 저는 남한에 와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는데요. 북한에  있었더라면 생각지도 못한 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성분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고 북한에서 나온 최고 학력이 전문학교가 전부였으니까요. 대학원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진짜 남한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 북한에서 전문대학을 다녔습니까?

김지연: 네, 상업전문학교라고 있어요. 거기서 요리학과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  기능공이란 학교에 가서 부기과를 나왔습니다.

북한에서 학교를 다녔으면 남쪽에서도 학력이 인정돼 상급학년으로 진학이 되는데 김 씨는  대학진학에서도 시행착오를 경험하게 됩니다.

김지연: 제가 처음 정보가 없어서 여기서 편입을 할 수 있었는데 잘 몰라서 대학 1학년부터  다녔습니다. 그리고 4년을 공부하고 지금은 평택 대학교 대학원 졸업반입니다.

대학공부도 어렵지만 남한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닌 몸에 베어버린 타성과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살았던 생활습관이었습니다.

김지연: 남한에 와서 보니까 열심히 해도 잘 안 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든다면 대학을 갈 것인가? 취업을 바로 할 것인가? 취업을 한다면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그런 고민이 저를 힘들게 했던 것같아요.

누구나 살다보면 어려운 순간을 수도 없이 맞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은 이 고난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는 거부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며 극복합니다. 힘들 때 이를 이겨내는 방법도 사람마다 틀린데요.

김지연: 저는 힘들 때는 음악을 많이 들었습니다. 남한 음악도 많이 듣고 고향생각 날 때마다 북한 민요도 듣고 북한에서 자주 들었던 휘파람도 듣고요. 요즘은 듣는 것만 하지 않고 바이올린 연주를 합니다. 남한에 와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까 바이올린을 구입해 연주하게 되더라고요.

기자: 지금 대학원을 다니면서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어떤 계획은 가지고 있습니까?

김지연: 저는 북한이탈주민 전문 상담사가 되고 싶습니다. 북한 출신이 남한에 처음 와서 여러 가지 직업을 얻고 경험 하는 과정에서 심리적인 안정과 직업선택에 있어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도전 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지식을 습득하고, 실습을 하고, 아마 머지않아 북한이탈주민전문상담사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 꿈을 향해서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대학원생 김지연(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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