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지난주에는 저와 함께 건강상담을 진행하는 강유 선생님이 북한에서 남쪽 안기부 자금을 받았다는 누명을 써 탈북 했다는 얘기를 전해드렸는데요. 오늘은 중국을 거쳐 남한에서의 10년 생활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기자: 남한에 가족을 데려간 것이 몇 년입니까?
강유: 2004년 5월 17일입니다.
기자: 결국 브로커를 통해 제3국을 경유해 한국에 가신 겁니까?
강유: 아닙니다. 처음에는 중국 목단강에 갔다가 교회에서 구원받고 북한선교를 하자고 했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잡혀 북송당할 수 있다고 목사님들이 그래서 하얼빈 중의학원 가서 검정시험을 치고 목단강 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시험성적을 보고 교원부에서 연락이 와서 병원 일을 했습니다.
기자: 목단강 병원에서 일하실 때는 중국 가짜 증명서를 가지고 계셨나요?
강유: 가짜는 아니고 죽은 사람의 호구는 원래 없애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때 김진혁이란 이름으로 다녔는데 아무리 검열을 해도 공안에 걸리지 않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이미 사망한 사람의 호구를 사서 지낼 수 있었지만 가족들의 신변안전이 보장되지 않아 결국 몽골을 통해 강유 선생님 일가족 6명은 남한 행을 합니다. 그때 강유선생님은 이미 환갑의 나이를 맞습니다.
기자: 북한에서 동의사였고 중국에서도 중의원에 다니셨으니 한국에서도 동의사를 해야지 했을 텐데요?
강유: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의사는 검증을 해보면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검증을 받은 이후에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원을 나오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노인 취급하는 겁니다. 복지관에 가서 점심 한 끼 먹는 것하고 인생을 편하게 사는 법 알려주고 운전면허를 따자니까 취직 준비하는 젊은 사람에게 필요한 거지 우리 나이에는 해당이 안 된다고 안 배워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했더니 국가에서 보장을 해준다며 인터넷도 안 배워주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혈압이 올라간 겁니다. 어떻게 살까 걱정이 돼서요. 한국은 능력에 따라 일한만큼 보수를 받고 자기 하는 만큼 잘 살수 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었거든요. 정착금은 브로커 비용 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잖습니까? 한 2년은 참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기자: 남한에 가서 동의사를 할 수 없었던 걸림돌은 뭐였습니까?
강유: 북한에서의 자격을 남한에서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북한의 학제를 인정 안했던 겁니다. 지금은 인정을 해줘서 학교가든지 시험을 치면 되는데 그땐 남한 대학을 다니고 시험을 쳐야 의사자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기자: 그러니까 남한에서 대학 6년을 다시 다닌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었군요?
강유: 그렇죠. 추천을 해달라고 해도 안 되고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 당시 민원편지를 쓰고 통일부, 보건복지부에 편지를 썼는데 소용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엔 헌법소헌까지 냈는데 역시 같았습니다. 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방도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기자: 한의사 활동을 못하셨는데 그동안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강유: 한국에서 우리가족을 다 받아줬는데 국가에서 주는 보조금을 받더라도 내 기술을 가지고 봉사하자 생각했습니다. 그때 '민중의술살리기부경연합'이라고 민간단체에 가입해서 거기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기자: 어떤 봉사활동입니까?
강유: 병을 진맥해보고 한의원으로 갈지 양방으로 갈지 상담도 해주고 소화되지 않고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는 침도 놔주고 이러면서 한 3년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자원봉사 센터에서 은뺏지도 타고 봉사상도 타고 그 후로 소문이 나서 허남식 부산 시장이 가정의 달 5월에 부부 표창도 하고 그랬습니다.
기자: 2007년인가요? 남한법이 개정이 돼서 북한에서의 자격이 인정돼서 시험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시도를 안 해보셨나요?
강유: 그때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느낀 것이 한의사가 1년에 1천명이 나온 다는 겁니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한의원이 있어도 문을 닫는데 나이도 70살에 가깝고 자원봉사도 하고 하니까 엄두를 못 냈습니다.
기자: 기회를 놓치셨는데, 한의사 자격증이 없어도 침은 놓을 수 있는 거죠?
강유: 침이나 부황 붙이고 뜸뜨고 이런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담만 해줘도 얼마나 좋습니까? 병에 대해 설명만 잘해줘도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기자: 선생님은 또 건강식품을 만들어 특허를 낸 것으로도 알려졌는데요.
강유: 네, 지난해에는 사회적 기업으로까지 인정을 받았습니다. '탈북의사 사랑봉사회'란 이름으로 사회적 기업 인정받았죠.
기자: 방송을 듣고 있는 북한 청취자를 위해 남쪽에서 특허를 낸 건강식품이 뭔지 잠깐 소개해주시죠.
강유: 네, 제가 만든 것은 오미자 시럽입니다. 오미자는 장수식품으로 지금처럼 황사가 심할 때는 오미자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마스크를 써도 체내에 들어온 먼지는 뱉어 버리거나 몸에서 폐를 좋게 해서 기능을 좋게 할 수는 없는데 오미자를 먹으면 저항력을 높여줘서 가래를 잘 나가게 하고 폐 면역을 활성화 시켜서 미세먼지를 체외로 잘 배출하게 하는 작용을 합니다.
기자: 처음에 한국에 가서는 운전면허나 컴퓨터 교육을 잘 못 받았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강유: 네 지금은 다 받았습니다. 운전면허는 받은 지 5년 되고 컴퓨터는 제 나이에 나만큼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사진편집부터 시작해서 문서편집, 동영상 편집까지 다 합니다. 너무 컴퓨터를 많이 하면 힘들어서 요즘은 적게 하는데 정말 부러운 것 없이 살고 있습니다.
기자: 남한생활이 10년 되는데 정리를 하자면 어떻습니까?
강유: 천지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생활을 하게 되고 이런 생각은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못했습니다. 저는 60년을 공산권에서 살아서 자본주의가 이럴 줄은 몰랐던 겁니다. 물론 자본주의도 좋고 나쁨이 있죠. 그러나 제가 살면서 보면 정말 만족합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정말 우리 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있었으면 더 효도했고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이 마음 아픕니다.
기자: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가지고 계십니까?
강유: 앞으로 저는 한 80살 까지는 여러 봉사활동 하면서 40여년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후대에 도움이 되는 책을 써서 흔적을 남기고 싶습니다.
제2의 고향 탈북 동의사 강유 선생님의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요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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