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내 인생을 남이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일도 내가 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지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에 있어 나는 주인공이 되는 건데요. 북한에서는 미래에 대해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남한에 가서는 모든 일을 자신이 계획하고 진행하는 것에 행복을 느낀답니다. 바로 함경북도 함흥 출신의 김명일 (가명) 씨입니다.
김명일: 저는 지금도 감사하면 살고 있어요. 그때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 남한생활 5년 차가 되는 김 씨는 처음 남한에 도착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북한에서 알지 못했던 행복을 맛봤기 때문이죠.
김명일: 저는 남한주의 사회는 철두철미하게 민주주의가 보장된 사회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제일 행복해요. 어떤 것이냐면 예를 들면 내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또 이동하고 싶은데로 이동하고 한마디로 제 인생을 제가 설계하고 제가 설계한 대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사람이 태어날 때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지 그리고 어떤 부모의 자녀로 태어날지는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결정되는 것이니 뭐라 할 수 없지만 태어난 이후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김 씨도 유소년기를 북한에서 보내면서 많은 생각을 했고 가치관이 성립되는 청소년기에 자신의 인생을 찾아 고향을 떠났습니다.
김명일: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조금씩 사회가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거기서 살았었는데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김정은이 세습을 하면서 정권을 잡아서 할아버지에 이어 정권 유지를 하는 겁니다. 결국 사회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섰고 원래는 19살부터 탈북을 생각했는데 부모 형제 때문에 못 오고 있었어요. 한국까지는 생각을 안했고 사실 중국을 선택했는데 어떻게 선을 준비하는 과정에 한국까지 갈 수 있는 루트를 제가 알게 된거예요. 그래서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남한에 가서 현재 김 씨가 하고 있는 일은 용접입니다. 이제 이 일을 한지 거의 4년이 되가는데요. 처음부터 그가 원했던 일이 전문 기술직은 아닙니다.
김명일: 처음에는 대학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대학 공부보다 과연 자본주의 사회 즉 한국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 어떤 일인가 탐문을 해봤어요. 북한에서 보면 별거 아닌데 남한은 사회가 발전하다 보니까 용접이란 직업은 일반주민이 선호하지 않고 차별시 하는 직업이더라고요. 그래서 조선소 가서 일을 했어요. 거기서 보온 하는 일을 했는데 실제 별개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거긴 돈을 엄청 많이 줘요. 북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도 주는 것은 없고 오직 사상적인 강요만 하거든요. 당과 수령에게 충성해야 된다. 우리가 지금 어렵더라도 이것을 극복해야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수 있다 이런 거짓선전만 하잖아요. 물론 지금은 북한주민들도 그것을 믿지 않지만요. 그런데 여기오면 1시간 일하면 얼마주고 또 10시간 일하면 그에 맞춰 돈을 주고 내가 노동력을 받친 것만큼 그에 대한 보수를 주니까 그게 또 행복한 거예요. 재미있고요.
남한에서는 학원에서 전문 기술을 배우기도 하지만 인터넷에 보여주는 동영상을 보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합니다. 용접 기술에 대해 자신의 강의를 올린 한 동영상 잠시 들어보시죠.
동영상 : 용접봉을 살짝 구부려서…불꽃길이는 요정도….
용접은 연료 가스와 산소를 적당히 혼합해 강한 불꽃을 만들어 두 개의 똑 같은 금속끼리 혹은 다른 금속 사이를 뜨거운 열을 가해 녹여 붙이는 기술을 말합니다. 용접을 할 때는 그 불꽃이 굉장해서 차광유리를 사용하지 않으면 시력을 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안전을 위한 장비도 많습니다.
기자: 용접일을 하면 힘에 부치는 일은 없습니까? 무거운 것도 들고 해야 하는데?
김명일: 아니요. 옆에 조력자가 있어서 다 옮기면 저는 용접만 하면 되기 때문에 지장 없습니다.
기자: 누구나 6개월만 배우면 용접을 할 수 있는 겁니까?
김명일: 본인의 의지에 관련된 거죠. 자격증이란 것이 배워도 본인이 하고 싶어하지 않고 젊은 사람들은 그런 일을 피하려는 경향도 있잖아요. 기본은 자기 의지와 관련돼서 자기가 뭘 해서 돈을 벌고 뭘 해서 성공하겠다 하는 의지에 따라 가능할 것 같습니다.
김 씨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혼자 삽니다. 그래서 집안청소, 빨리 그리고 요리도 모두 스스로 알아서 해결 합니다. 아무래도 남자 혼자 사니까 먹는 문제가 쉽지 않을 듯 한데요.
김명일: 저는 혼자서 잘 만들어 먹고 있습니다. 1년 동안은 정말 혼자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적응이 돼서 혼자서도 잘해서 먹고 적응하고 있습니다.
기자: 주로 어떤 음식을 해서 먹습니까?
김명일: 주로 밥에다 계란 후라이 김치찌개도 좋아하고 여기서 된장 찌개를 잘해먹어요. 한끼씩 해서 먹는 것이 아니고 며칠분을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 놓고 다시 꺼내 먹으면 괜찮더라고요.
남한에 가서 편리해진 생활 중 하나를 손꼽으라면 운전입니다. 자신이 직접 차를 몰고 원하는 곳을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것인데요. 용접일을 하려면 용접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듯 운전을 하려면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김 씨는 용접 자격증 보다 운전 면허를 따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합니다.
김명일: 저는 7번만에 땄어요.
기자: 왜 그렇게 오래 걸리셨어요?
김명일: 제가 운전을 북한에 있을 땐 못 해보고 여기서 해봤는데 생각은 뻔한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운전할 때 옆에서 차가 끼어들고 하면 공포감이 들어서 7번 만에 합격해서 면허증 받았어요. 필기는 한 번에 붙고요.
기자: 지금은 어떠세요? 운전하는 것이
김명일: 지금은 자유 자제로 운전을 잘하죠. 그때는 내가 왜그랬나 싶죠.
기자: 운전과 용접기술 배운 것 하고 남한생활 5면에 이뤄놓은 거내요?
김명일: 네, 그렇죠
기자: 저금 통장의 금액은 좀 불었습니까?
김명일: 네, 북한에 있었으면 죽을 때까지 못벌었을 것같아요. 돈이 자신감이죠.
김 씨가 남한에서 생활하면서 제일 좋은 것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설계하고 그에 따라 생활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김명일: 내가 이번주에는 일하고 이번 겨울에 한달동안 태국 여행을 가겠다고 한다면 갔다 오고 북한 같은면 상상도 못할 일이잖아요. 북한에선 자기 동네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증명서란 것도 없고 여권만 있으면 어디든 가고 그런 것이 좋아요.
힘든 날만 있다면 참 살기가 고통스러울텐데요. 인생이란 것이 비오는 날도 있고 해뜨는 날도 있듯 현재 힘들다고 신세한탄만 하지 말고 더 좋은 날을 기다리면서 살면 분명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김명일: 저는 한가지만 생각해요. 내가 그 체제 사회가 싫어서 여기서 내가 바꾼다고 변할 것은 하나도 없고 내가 지금 조건과 환경에 만족하고 승복해야지만 내가 행복해진다고 생각하고 위안을 하면서 극복하죠. 앞으로는 현재 하고 있는 일을 10년 정도 더 하고 돈이 좀 마련되면 작은 가게를 운영하면서 살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함흥 출신의 김명일 (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