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아프리카 여행을 하고 싶어요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6.06.21
africa_woman_b 오모 강 주변에서 만난 카로족 소녀들이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는 제품 검수원으로 일했는데 남한에 가서는 회사 경리를 보는 여성이 있습니다. 열 살 된 딸과 함께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탈북여성 이예림(가명) 씨의 이야기입니다.

이예림: 이 사회도 호락호락한 사회가 아니니까 그냥 버티자. 누가 이기는가 보자 했죠. 절대 안 나왔어요. 현장 직원들도 정말 나보고 대단하다고 그래요.

함경북도 길주군 출신의 이 씨는 남한적응과 관련 일보다는 사람 상대하는 것이 힘들다면서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오기라고 했습니다. 누굴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일이니까 어려운 고비를 만나면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 나간다는 것이죠. 이제 남한생활 15년을 됐는데 탈북당시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이예림: 형제가 많다 보니까 정말 살기 힘들었어요. 죽물도 못 먹었어요. 제가 맏딸이었고 할머니 있었고 부모님하고 고모까지 집이 없어서 우리 집에 살 때였어요.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 하다면서 떠올린 탈북 당시의 상황은 정말 한심한 처지였다는 겁니다. 스물 두 살의 나이에 두만강을 건넜고 잠시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식량을 사오자는 것이 중국에서 10년 세월이 돼버렸습니다. 산둥성에서 가짜 호구를 만들어 살면서 더는 더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 남한으로 가게 됩니다.

이예림: 중국에 있을 때는 절대 한국에 안 간다고 했어요. 북한에서 배운 한국에 대한 생각이 있어서 그랬죠. 친구들이 먼저 한국에 갔는데 너무 좋다고 매일 전화를 해서 한국 오라고 했어요. 그때 당시 제가 장사를 하다가 일도 잘 안되고 해서 한국가면 집도 주고 한다고 해서 안가겠다던 마음이 갑자기 돌아서서 제가 오게 됐죠.

북한출신이 남한에 가면 제일 먼저 3개월을 머물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교육을 받는 곳이 하나원입니다. 이곳에서 귀가 아프게 들었던 말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 그래서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취업을 하게 됩니다.

이예림: 제가 2010년 12월에 하나원을 나와서 1월에 바로 취업을 했어요. 아이가 있었는데  그때는 중국말만 많이 했어요. 하루 3교대를 하는데 아이가 너무 우는 거예요. 밤에 혼자  있으니까 엄마 가지 말라고 얼마나 우는지... 제가 보름 만에 취직해서 5년 거기서 근무 했어요.

하루 8시간 노동을 하기 때문에 3교대로 24시간 업무가 돌아가는 직장입니다. 처음에는 바깥근무를 하다가 사무실로 갔는데요. 사장님이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사정을 알고는 밤 근무에서는 빼고 사무실 주간 근무로 형편을 봐준 겁니다.

이예림: 바깥근무는 차가 고속도로 오갈 때 돈 받는 거죠. 차가 진입할 때는 표를 뽑아 진입하고 고속도로 내릴 때는 우리가 돈을 받는데 다시 말해 징수원을 했죠. 사무실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 업무를 하는 거죠. 1년 만에 사무실 가서 4년을 그 일을 했죠. 또 일하면서 세무회계 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졸업을 했죠.

기자: 한국에 갔을 때 나이가 벌써 30대였는데요.

이예림: 네, 30대 중반이었죠.

기자: 돈 액수가 큰데 징수원 일하면서 시행착오를 겪지는 않았습니까?

이예림: 돈도 잘 몰랐고 실수도 많이 했어요. 그렇게 시작을 했는데 한 6개월 되니까 알겠더라고요. 주변에서 많이 도와줬어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첫 직장과 태어나 처음 운전대를 잡았던 일인데요. 일터인 고속도로 초입까지 운행하는 대중교통이 없었기 때문에 자동차를 구입해 타게 됩니다.

이예림: 겨울이니까 눈이 엄청 많이 와서 버스가 안다녀서 걸어서 가니까 깜짝 놀라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되겠다 운전을 해야 겠다 해서 제가 100만원을 주고 아토스라고 빨간 차를 샀는데 밤에 잠을 못 잤어요. 누가 밤에 혹시 훔쳐갈까봐요. 내가 운전을 해도 차가 가는 구나 생각을 하니까 참 신기하고 희한했어요.

8시간 사무실 일을 하고는 집에 가서 딸아이만 돌봤던 것은 아닙니다. 일이 끝나면 야간 대학에 가서 공부합니다.

이예림: 원래 세무회계 용어 자체가 어려워요. 제가 톨게이트 나와서 1년은 대학을 안다니고 기초를 쌓는다고 학원을 다니고 대학진학을 했어요. 학교도 방학 때면 학원을  따로 다니면서 공부를 했고요. 덕분에 점수도 잘 받았고 자격증도 땄고요. 크게 성공했다고 보기는 그렇지만 어느 정도는 내 소원대로 이뤄졌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함은 있어요.

어린 딸아이가 엄마를 보고 싶다고 울며 매달리는 것을 떼어 놓고 다시 학교로 간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요.

이예림: 제가 북한에서 상업대학 다니다 생활이 어려워서 결국 중퇴를 했는데 그때 설움이 항상 남아있어서 여기 와서 대학에 갔죠. 지금 제일 후회가 되는 것이 왜 한국에 남들처럼 빨리 오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를 해요.

기자: 지금은 어느 회사에 다니세요?

이예림: 가구제조업체인데요. 거기서 경리를 맡고 있어요. 직원은 70명 정도 되고요.

이제 10살 된 딸은 남한적응이 엄마보다 빨라 학교에서 우등생입니다.

이예림: 아이는 혼자 놔둬도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고요. 상도 많이 받고 하니까 너무  아이한테 고맙죠.

기자: 무슨 상을 그렇게 받습니까?

이예림: 글짓기 상, 수학도 학교에서 1등하고 독서 잘하고 그림 그려 상도 받고요. 난 아이가 수학을 하면 100점은 맞을 때가 잘 없고 하나 둘씩 틀려서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는가? 해서 학교에 전화를 해보면 선생님이 상위권이라고 하더라고요.

기자: 학원을 많이 보내시나요?

이예림: 학원은 한 곳만 보내고 학습지 공부를 해요. 제가 마음이 아픈 것이 아이는  아기자기 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어요. 너무 어른스럽다는 느낌이 들어 부모로서 그것이 마음이 아파요. 혼자 두고 일 다니고 하니까요.

이 씨는 이제 자기 집 마련의 꿈을 이루게 됩니다. 현재 17평에서 33평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딸아이와 여행도 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예림: 아이 데리고 아프리카 같은 후진국을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어요. 딸아이에게 북한 아이들은 밥도 못 먹고 그렇다고 하면 딸이 북한아이들은 밥도 안 먹어도 되니까 얼마나 좋을까 그래요. 밥 먹기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후진국에 꼭 체험을 가고 싶어요. 그래서  후진국 아이들은 어떻게 사는지 가서 보여주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이예림(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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