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방송인 이순실 음식점 사장 되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3.07.30
leesoonshil_restaurant 이순실 씨(왼쪽)와 최근 개업한 식당 ‘평양댁 순실이네’ 내부 모습.
사진-이순실 씨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한데요. 죽음의 사선을 넘어 남한에 간 후 자신의 음식점을 개업하고 요즘 정신없이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탈북여성 이순실 씨인데요. 오늘은 남한생활 6년차가 되는 이 씨의 얘기 전해드립니다.

이순실: 북한에서 이순실로 다 알고 있어요. 제가 텔레비전에 나가서 협박도 많이 받고...

평양시 보통강 구역에서 태어났고 개성에서 군사복무를 한 이순실 씨는 현재 남한에서 탈북여성들이 출현해 북한에서의 생활과 자신의 체험을 고백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 텔레비전 방송에 고정 출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순실 씨가 북한에서도 방송 일을 했던 것은 아닌데요. 어떻게 고향을 떠나게 됐는지 탈북동기부터 들어보죠.

이순실: 군사복무를 개성시 장풍군에서 11년 간호장교로 복무했습니다. 군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제대해서 사회 나가 보니까 가난, 고통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제대하고는 국가에서 해주는 것으로 사회 나가서도 잘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죠. 제대비 40원을 받았습니다. 일반 간부의 월급이 70원일 때라 큰돈이었죠. 집에 가보니까 동생도 다 꽃제비 나가고 엄마도 돌아가시고 가제도구는 다 장마당에 팔아서 없지 쌀독에 거미줄이 쳐져있을 정도였어요. 장마당에 가보니까 쌀 한 키로가 125원 하는 거예요. 40원 가지고 뭘 살까 하다가 강냉이 옥수수 가루를 조금 사고 들판에 나가서 달래, 냉이, 산나물을 캐서 범벅 죽을 해서 먹었어요. 그것마저 떨어지기 시작해서.

이 씨가 제대 후 사회에서 느꼈던 것은 비참함 그 자체입니다. 제대 당시에도 상황이 어려워져간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자신이 사회에 나가서 먹을 것을 구걸하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던 겁니다.

이순실: 91년에 사회에 나와서 93년까지 집 근처에서 나돌았죠. 그때까지는 꽃제비 생활은 안하고 나물 먹고 살았죠. 93년부터 엄청난 고난이 있었습니다.

기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인데도 그렇게 힘들었단 말입니까?

이순실: 네, 전입니다. 그래도 제가 제대하기 전에 군에서는 벌써 영양실조 환자가 많았어요. 그래서 우리병원에는 영양실조 환자를 대상으로 병동을 따로 만들었어요. 텐트를 따로 만들어서 천막생활을 하면서요.

이 씨는 1997년부터 10년 동안 탈북해서 8번 중국에서 강제북송을 당했고 9번 만에 성공해 남한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게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생활이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기자: 북한에 있는 친구들에게 남한생활을 얘기해줘야 하는데 남한에서는 6년 동안 어떤

일을 해보셨나요?

이순실: 남한에 처음 와서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손님처럼 대우받고 살줄 알았어요. 그런데 일반인과 똑같은 삶이었어요. 나가서 힘들게 일도 해야겠고 해서 공사장 함바에서 도로 까는 것부터 시작해서 회사에서 컴퓨터 부속품 만드는 일도 했지만 직장에서 사람들이 탈북자라고 우릴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느낌을 받아서 일을 못하고 혼자 독립하게 됐어요.

3년 동안 함바를 운영했어요. 내가 북송당해 감옥에서 보위부 사람들에게 고문을 많이 당하면서 머릴 많이 다쳤어요. 그래서 자꾸 잊어버리니까 인터넷에 블러그를 만들어서 내 사연을 많이 올렸는데 방송국에서 그걸 보고 불러서 작년 1월부터 방송을 하는 겁니다.

이순실 씨가 말하는 함바집은 토목 건설현장에서 주로 공사장 인부들이 식사를 하는 현장식당입니다. 식당일을 하면서 인터넷 가상공간에 자신의 북한 생활과 탈북 체험담을 수기형식으로 올려놓은 것을 본 방송국에서 섭외가 들어와 일을 하게 됐다고 하는 겁니다. 처음해보는 일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통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순실: 북한에는 보여주는 모습이 다 설정된 모습이고 사람인데 여기는 전부 그대로 촬영해서 방영이 되니까 신기하고 우리는 방송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그냥 쭉 말하는데 듣다 보면 같이 방송에 출연한 어린 친구들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방송을 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많지만 미워하기도 뭣하고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방송에 나온 북한 친구들을 보면 빨리 통일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처음에는 통일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송을 보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통일이

될 것 같아요.

방송을 통해 북한이 얼마나 폐쇄된 사회였나를 알게 돼 새삼 놀라기도 한다고 하는데요. 자기 지방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면 서로 믿지 못하기도 하지만 결국 얘기를 다 모아 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란 겁니다. 이순실 씨가 방송을 계속 하는 이유입니다.

이순실: 저는 예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나가는 건 아닙니다. 방송을 통해 북한인권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방송을 하고 있어요.

이순실 씨는 이제 또 다른 목표가 하나 생겼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야심차게 강릉에 식당을 열었습니다.

이순실: 우리 가게가 ‘평양댁 순실이네’란 이름이고 100평 규모입니다. 홀에서 일하는

사람이 9명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이 4명이예요. 식탁은 38개입니다. 고기, 냉면, 온면,

순대, 만두, 녹두전 등 평양의 음식을 하고 있어요.

기자: 고기는 어떤 식으로 파는 겁니까?

이순실: 자리에 앉아서 소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게 돼있습니다. 지금 식당은 함바집을 할 때처럼 힘들진 않아요. 또 탈북할 때처럼 힘든 일도 아니기 때문에 고난이 아니예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남들은 걱정도 해주지만 저는 신앙도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새로 개업한 이순실 씨 꼭 계획하고 있는 꿈 이루시길 바랍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 방송인 이순실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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