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사업 해야죠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5.08.04
restaurant_open_305 탈북자들이 만든 도시락 공장 '행복나눔식당'.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함경남도 출신으로 1999년 탈북한 김설희(가명) 씨를 소개합니다. 김 씨는 한 때 문학을 공부하며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점포를 여러 개 거느린 식당

사장이 되기 위해 착실히 준비 중입니다. 김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입니다.

김설희: 그때는 진짜 모든 사람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솔직히 공장 기계에서 동을 뜯어서 장마당에서 팔고 먹을 것과 바꿔먹고 그랬으니까 공장도 돌아가지 않았던 상황이었죠.

탈북해 중국에서의 생활을 거쳐 2003년 남한으로 갑니다. 일단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자리부터 찾습니다.

김설희: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처음에는 주유소에서 충전하는 것부터 배웠습니다. 한국

돈하고 북한 돈의 액수가 틀려요. 북한돈은 1원, 2원 이런데 한국은 공이 많이 붙잖아요. 한참 돈 계산하다가 주유를 빨리 못해 주유기를 못 뽑은 상태에서 차를 출발 시켜서 기름을 쏟고 손해를 보면 제가 반을 배상하고 그랬어요.

남한에서는 자동차 기름을 넣는 곳을 주유소라고 부르고 주유하는 것을 충전한다고 합니다.  북한과 달리 돈을 세는 단위가 커서 애를 먹었다는 거죠.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데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힘든 것은 사람들과 사이에 벌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설희: 인간관계요. 충전소에 다닐 때는 몰랐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상사도 없고 서열도 없고 사모님이 관리를 하시니까 사모님께만 충성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예전에는 3명이 하던 일을 나 혼자 하는데 급여도 안 오르고 해서 직장을 옮겼어요. 그리고 깨달았는데 북한은 선후배가 없어요. 자기만 잘하면 영웅이 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는 나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상사가 있고 하니까요. 민폐를 끼치는 경우도 있죠. 솔직히 앉을자리 날 자리를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른다는 거죠.

열심히 일하니 돈은 모였는데 이것은 월급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일하느라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고 먹는 것은 직장에서 해결하고 옷은 시장 통에서 싼 것으로 사서 입으니 버는 대로 모이게 되는 거죠. 그렇게

악착스럽게 돈을 모아야 했던 이유가 있는데요.

김설희: 솔직히 엄마가 안계시면 그렇게 많은 돈을 보낼 이유가 없었어요. 엄마가 동생들

에게 돈을 나눠주는 기뻐하시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보낸 거예요. 엄마가 밥 굶지 않고 누가 배고파서 물 좀 먹읍시다 하고 문을 열면 외면하지 말고 누룽지라도 주라고 돈을 보낸 거죠.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육고기라도 드시라고 당부를 했었어요. 그런데 전화통화를 해보니 그렇게 하지 못하고 계신 거예요. 그러면 내가 보내준 돈은 다 뭐했냐고요? 내 마음이 쌩한 것이 오면서 그 빈 마음이 채워지질 않더라고요.

남한에 사는 많은 탈북자가 북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송금하고 있습니다. 그 액수는 전부 다르지만 북에 송금을 하는 이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남한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지는 않는 다는 겁니다. 돈이 많아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놀 것 안 놀고 사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으면서 지출을 최대로 줄여 푼푼이 모아둔 돈을 북에 있는 가족을 위해 보낸다는 겁니다.

김 씨는 북한에서의 생활과 탈북해 중국에서 경험한 것들을 남한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글을 보고 북한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대학에 가서 작가 수업을 받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김설희: 문학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문학보다는 외국 문학에 대해 가르쳤어요. 북한은 처음부터 김일성에서 시작해 김일성으로 끝나는 곳에서 살아서 한국에서 말하는 예술 그리고 외국의 문학은 무슨 말을 하는 지 못 알아듣겠고 왜 이것을 배워야하지 한국 문학한다고

하는데 외국 것을 배우는 이유가 뭔지 못 알아들으니까 정말 속상했어요. 교수님 말씀을

받아 적으면서도 무슨 말인지 진짜 모르겠더라고요.

대학을 마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북에 있는 가족 때문입니다. 다시 연락이 온 겁니다.먹고 살기 어려우니 형편이 되면 어렵게 사는 가족을 위해 방조(도움)를 해달라는 거죠.

그렇게 다시 일자리로 돌아간 김 씨는 이후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식당일인데요. 경리일은 자신이 북한에서부터 해왔던 것이라 했던

것이고 진짜 취미가 있고 재밌게 할 수 있는 것이 요리입니다.

김설희: 제가 가게를 처음 30평 이상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크게 설계를 했는데 이

식당 저 식당 돌면서 일해 보니까 처음부터 크게 할 일은 아니구나. 작게 시작해도 진심

으로 싱싱한 식재료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람들이

맛으로 배부르게 하지 배고파서 허기를 채우려고 먹지 않아요. 오늘 안 팔렸다고 내일 또 꺼내 놓는다면 10년 장사할 것을 3년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힘든 만큼 시련을 이겨내는 만큼 강해진다고 이제 김 씨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는데요. 몇 년 일해서 종자돈을 모은 다음 작은 가게부터 시작해 점포수를 늘려

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설희: 10년 뒤의 모습은 회장까지는 못 되도 가게 3개 정도는 운영하는 사장이 돼있을 겁니다. 알아야 될 것 몰라도 될 것을 너무 알아버렸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배우고 있는 거죠. 신이 내가 철딱서니 없이 살았던 것을 일깨우기 위해 지금의 시련을 주지 않는가? 스스로 내 자신 위로하고 있고요. 뭔가를 하면 정말 잘할 겁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설희(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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