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면 생각나는 내 고향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4.09.16
gaepoong_village_305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들녘이 평온해 보인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으로 간 탈북자들은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 모두들 열심입니다. 그렇게 현실 생활에 애쓰다 보면 고향을 잠시 잊기도 하지만 가족이 한데 모이는 명절이면 어김없이 북에 두고온 가족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합니다. 오늘은 남한생활 8년차가 되는 탈북여성 박희영(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박희영: 아무래도 이맘때쯤이면 엄마 아버지 돌아가신지 거의 20년이 됐는데 산소도 못보고 하니까...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함경북도 출신의 박희영 씨는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명절에 우울해집니다. 북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입니다.

박희영: 여기 와 보니까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자식들 다 모여서 제사상 차려놓고 인사를 하는데 난 나를 키워준 부모 제사상을 못 차리니까 가슴이 아픈 거예요. 북한에서는 음식도 못했는데 여기서는 남편하고 그래도 음식을 차리고 하니까 엄마 아빠가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막내가 좋은 세상에 왔다 그러실 것 같아요.

사실 박 씨가 살았던 곳은 무산군에서도 한참 들어간 산골로 하늘아래 첫 동네로 불린  온천리 입니다. 순박한 시골 인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지만 문명의 혜택이 제일 늦게 들어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박희영: 이북에서는 텔레비전이 없으니까 저녁에 밥 먹자마자 텔레비전 있는 집으로 뛰어갔어요.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요. 여기선 작든 어떻든 내 이름으로 된 집이 있고 전자제품이 있고 정수기도 있고 세탁기도 있고 밥솥도 있지 하니까 때로는 너무 행복하고,  편안하고 남편이 잘해주니까 북한에 대한 생각도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이런 명절이면 보름달을 보고 생각이 나고 하니까 가슴이 아프죠.

탈북해서 중국생활을 거쳐 남한으로 간 박희영 씨는 지금 되돌아보면 그리 순탄한 인생을  산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지병으로 몸이 아파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탈북해서도 쫓겨 다니는 고달픈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남한에 가서 인생이 달라진 거죠. 자신도 이제야 뭔가 희망이 보인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박희영: 저는 여기 도착해서 부터요 2006년 8월에 공항에 도착했는데 공항에 내려서부터 내 몸이 자유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일단 언어가 통하잖아요. 중국에서는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말이 안통하고 누가 또 고발을 하면 북송당하고 하니까 맘을 졸이는데 인천공항 도착하니까 그때부터 이젠 자유구나 했죠. 또 여기서 보면 경찰서를 가도 내가 당당하면 마음껏 나서고 저항을 하잖아요.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잘 왔다는 생각이죠. 내가 아프면 국가에서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내려오잖아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밥 먹고 싶으면 밥 먹고, 고기 먹고 싶으면 고기 먹고, 가고 싶은 곳은 얼마든지 마음껏 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박 씨는 지금 중국에서 만난 분과 함께 남한으로 가서 살고 있는데요. 남편분이 자상하게 자신을 보살펴준다고 해서 기자가 잠시 통화를 했습니다.

남편: 여보세요. 예, 안녕하세요?

기자: 중국에 있었으면 명절을 크게 쇘을 텐데 우울하지 않으셨나요?

남편: 우울하기보다...저도 중국 가서 가족과 모이는 그 마음은 굴뚝같지만 집사람이 몸도 안 좋고 혼자 몸이지 하니까 형편도 안 되고 해서 집사람과 있어야죠.

기자: 음식은 많이 하셨나요?

남편: 아닙니다. 요새 집사람이 많이 아파서 병원에서 의사가 음식 조절하라고 했습니다. 고기는 먹지 말고 몸에 좋은 야채 몇 가지 알려준 것으로 만들고 있어요.

기자: 한국 생활에 만족합니까?

남편: 어찌 보면 집사람 때문에 한국 왔는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노력해서 적응 해야죠. 그래서 평생 같이 살 겁니다.

굵은 목소리에 성격이 참 좋아 보이는 느낌을 주는 박 씨의 남편 말처럼 둘은 열심히 남한 생활에 적응 중입니다. 남한 생활이 8년이 되지만 몸이 안 좋아서 일을 한다거나 학교에 다니면서 교육을 받지는 못하지만 꿈을 접은 것은 아니랍니다.

박희영: 이 나라에 대한 것을 많이 알아서 안 것만큼 이북에 가서 알려주는 그런 공부를 하고 싶어요. 딱 무슨 공부를 하겠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저는 그냥 자유나라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고 싶어요. 어릴 때 꿈은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지금은 아프면서 목소리가 작아졌지만 어릴 땐 좋았어요.

노래 얘기가 니와서 어떤 노래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니 바로 실력이 나옵니다.

박희영: 진미령의 ‘미운 사랑’ 남몰래 기다리다가 가슴만 태우는 사랑....

박희영 씨는 이렇게 힘들 때 그리고 고향이 그리운 날이면 혼자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이 꿈꾸는 행복한 세상을 그립답니다.

박희영: 이 좋은 나라 아름다운 나라에서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을 위해 그래도 저는 움직이고 말을 할 수는 있는 데 걷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봉사를 하면서 살아가려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박희영(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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