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 혜련이 찾았습니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7-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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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망배단에서 한 시민이 철조망 사이로 북녘을 바라보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망배단에서 한 시민이 철조망 사이로 북녘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하물며 그 대상이 어릴 때 생이별한  딸이라면 그 엄마의 마음은 세상 그무엇으로도 표현하기 힘들겁니다. 딸을 찾아 12년을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던 김순희 씨가 드디어 딸 혜련 씨를 만납니다. 오늘은 남한의 항구도시 부산에 사는 김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순희: 지금은 이 세상에서 제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다른 것이 눈에 하나도 안보여요. 제가 제일 행복한 여자가 돼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아요.

청취자 여러분 중에도 RFA 자유아시아방송에서 기자가 2015년 3월 “내 딸 혜련이를 찾습니다.” 그리고 2016년 10월 “큰딸 윤혜련을 찾습니다.”란 제목으로 방송을 해서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바로 그 딸을 찾았습니다. 잠시 그때 기억을 되살리면서 당시 23살이었던 딸에게 보내는 김순희 씨의 음성 들어보시죠.

김순희: 사랑하는 내 딸 혜련아. 엄마는 너와 헤어진 날부터 오늘까지 어느 하루도 널 잊은 적이 없단다. 엄마는 믿는다. 사랑하는 내 딸 혜련이는 어디서 살든 굳세게 살고 있으리라 믿고 만나는 날까지 엄마가 꼭 찾을테니까 기다려 다오. 아프지 말고 혜련아 사랑한다.

김 씨가 딸을 찾고 있다는 애끓는 사연은 이후 남한언론에서도 반향을 일으켰고 탈북자가 출연하는 텔레비젼 방송을 통해 사연이 공개됐습니다. 그리고는 그 방송을 중국에서 본 혜련 씨가 연락을 해 왔습니다.

김순희: 처음에 방송사에서 사진을 내놓더라고요. 사진을 봐서는 14살 때 얼굴하고 너무 변해서 진짜 내딸이 맞나 할 정도로 변했더라고요. 예쁘게 변해서 잘 몰랐는데 전화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내딸이 맞다고 생각하는 순간 숨이 헉 멎는 것 같더라고요.

먹을 것이 없어 살기 위해 탈북을 했고 그 과정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딸과 헤어지게 된 거죠. 김 씨는 탈북당시를 이렇게 말합니다.

김순희: 북한에서 집없이 나앉을정도로 꽃제비 형편이 돼서 탈북했어요. 그때 3명이 같이 탈북하다 잡히면 다 죽는다고 자기가 좀 크기 때문에 힘들어도 자기가 남겠다고 동생을 데리고 엄마가 먼저 탈북해서 자릴 잡으면 연락을 달라고 해서 제가 작은 딸을 먼저  데리고 탈북했거든요. 탈북해서 한 달만에 큰딸에게 연락을 주기로 했는데 조금 늦었거든요. 지나서 연락을 하니까 그 사이 밀수꾼들이 큰딸을 다른 곳으로 넘겼더라고요. 그래서 12년 세월을 만나지 못하고 헤어져 살았거든요.

양강도 혜산 출신의 김씨는 잠시 중국에서의 살다가 함께 탈북한 둘째딸과 2005년 남한에 입국합니다. 그리고 큰 딸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에 너무 걱정한 나머지 급기야 우을증에  뇌출혈까지 와서 건강을 크게 상했습니다. 그렇게 만나고 싶어했던 딸이 연락을 해오자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만약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답니다.

김순희: 사람의 욕심이 끝이없다고 하더니 어딘가 살아있다는 소식만 들어도 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있다는 소식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듣고 사진을 보니까 말로 다 표현을 못하겠더라고요. 지금까지 너무 힘들게 살았는데 딸을 찾고 조금 있으면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그 힘든 세월을 잘 버텨왔으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구나 하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도 신심을 가지고 앞을 보고 웃으면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더욱 들더라고요. 큰딸을 찾고는 제가 알바를 시작했습니다. 정신적으로 더 강해진다고 할까요?

기자: 딸을 찾고 나서 일을 다시 시작하신 겁니까?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김순희: 식당 일을 다시 시작했어요. 주방에서 설거지 일을 합니다. 일을 아무리 힘들게 해도 힘든줄 몰라요. 그전에는 내가 웃어도 내 얼굴이 수심에 잠겨있고 그늘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고 아픈사람같지 않다고 얼굴이 밝아졌다고 모두들 그럽니다. 제 자신 기운이 나고 조금이라고 더 일하고 싶고요.

기자: 그래서 몇시간을 일하십니까?

김순희: 아침 9시반에 나가서 밤 10시까지인데 밤 10시 지나서 12시까지 할때도 있고 더 할 때는 1시까지 할때도 있고 두 달을 그렇게 해왔어요.

기자: 그러면 하루 평균 12시간을 일한다는 얘긴데 갑자기 그렇게 무리해서 일하면 몸이 견뎌냅니까?

김순희: 피곤해도 그래도 아직까지 힘들어 눕고 싶다는 생각은 없고 딸이 오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운이 나요.

기자: 제 생각에는 짐작컨데 딸이 오니까 오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옷도 예쁜 것 사주고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이래서 긴 시간 일을 하는 것 같은데요.

김순희: 맞아요. 해주지 못한 것을 해주겠다는 생각에 그저 빨리 돈을 벌어서 딸이 오면 12년 세월 해주지 못한 것을 해주고픈 마음 뿐이예요.

기자: 사실 일을 안해도 되는데 무리를 하는 것 같은데요.

김순희: 사실 무리죠. 팔도 쓰지 못해서 수술을 할 형편이지만 파스를 붙이고 무통 주사를 맞아가면서 계속 일을 하고 있거든요.

큰어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엄마를 볼때마다 옆에서 그모습을 지켜보는 둘째딸의 마음도 힘들었다는 것을 잘압니다. 그런데도 아무 불평없이 자기 할일을 잘해가는 딸이 고맙습니다.

김순희: 향심이도 공부 열심히 해서 3개 대학에 원서를 냈는데 다 돼서 서로 오라고 하는데  단국대학 심리치료사 학과를 가겠다고 했어요. 내가 아픈 것을 보고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는 그 공부를 하겠다고 했어요.

자식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 그리고 그런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딸의 마음. 이런 거짓이 없이 지켜야하는 도리가 있기에 부모자식 사이를 하늘이 맺어준 인연 즉 천륜이라 부르나 봅니다.

김순희: 살아줘서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어요. 우리 딸도 그러더라고요. 왜 다른 아이들은 한국행을 다 하는데 중국에 남아있었는가 물어보니까 엄마하고 동생이 중국으로 먼저 간 것을 알았는데 혹시나 북송되면 자기가 중국에서 엄마하고 동생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한국에 오지 못하고 중국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엄마하고 동생이 한국으로 간 것을 알아서 오게됐다고 했어요. 엄마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자기가 오게 되면 엄마를 더는 고생시키지 않고 노력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딸이 너무 대견스럽고 너무 맘이 아프더라고요.

제 3국에서 한국행을 하는 딸 혜련이가 도착하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세모녀의 가족여행이라도 떠나고 싶다는 김순희 씨. 이제 두발 쭉 뻗고 잘 수 있게 됐습니다.

김순희: 이제는 바랄 것이 없어요. 딸들이 잘되만 바래는 것죠. 이제 두 자식을 다 거느렸으니 딸들만 잘되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12년만에 큰 딸 혜련이를 찾은 김순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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