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길: 위안부 결의안 통과위해 힘쓰는 이용수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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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원희 leew@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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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이용수 할머니 - PHOTO courtesy of HR121 가주연대

미국 연방의회 하원은 2차세계대전중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을 7월 말 경 본회의 표결에 부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결의안 통과를 위해 60년 전 실제 위안부였던 한국의 이용수 할머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해 과거 자신이 당했던 일을 낱낱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용수: 제가, 가미가제 부대의 산증인입니다. 그러니 이번에 본회의에 결의안이 통과 되도록 미국 국회의 의원님들 꼭꼭 서명해서 통과 되도록 해 주십시오.

15살의 어린나이에 아무 영문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끌려가 일생을 위안부라는 치욕 속에서 살아온 이용수 할머니는 내년이면 여든 살이 됩니다. 이 할머니는 위안부들의 인권을 회복하고 명예를 찾는 일이라면 60년이 지난 현재에도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고 좇아가 진실을 알리고 싶다고 합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모두 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용수: 제가 왜 위안부 입니까 위안부 아닙니다. 저는 엄마 아버지가 지어준 이용수고 위안부 일본이 만들었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딸입니다. 절대적으로 우리 명예회복 해야 됩니다. 우리나라 명예회복도 해야겠습니다. 명예회복을 위해 할머니들이 오래 오래 사실 겁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지난 1944년 15살꽃다운 나이에 한밤중에 가족들도 모르게 일본군인 에게 끌려갔습니다. 이것이 일본군 성노예인 위안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용수: 저는 밤에 창문 봉창이 있었는데 내다보니 여자하고 일본 군인이 모자를 내리쓰고 있어요. 집안으로 둘이 들어와서 여자아이가 어깨를 감싸고 한손으로는 입을 막고 군인은 뒤 등에다 무언가를 콱 찌르면서 둘이 밀면서 끌려가니까 거기 여자아이하고 또 다른 군인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끌려간 여성이 5명 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일본군인들을 따라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습니다.

이용수: 어디인지도 모르고 갔는데 어느 곳인지 내리고 또 다시 기차를 타고 평양에 가서 평양 에서 또 기차를 타고 대련에 갔습니다. 거기 가니 배가 많이 있었어요 (일본) 군인이 굉장히 많았는데 한 300명도 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태우고 거기다 여자아이를 5명을 태웠습니다.

일본 군인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다시 이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배를 타면서부터 짐승 같은 일본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용수: 배안에서도 저는 몰랐습니다. 여자 남자는 알았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덤비는 것을 몰랐어요. 그랬는데 배가 울렁거리고 해서 배 안의 화장실에 갔습니다. 화장실에 가서 일어서려고 하니까 군인구두가 보이 길래 처다 보니 그 군인이 저를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두 팔로 벌려서 그래서 또 다시 나오려 하니까 또 못나오게 해서 팔을 물었는데 그때 세게 맞은 기억은 나는데 그 다음에는 모르겠어요.

이런 상황에서 한참 항해를 하다가, 배에서 내리게 되었는데 당시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었다고 이 영수 할머니는 말합니다. 그때 트럭 한 대가 와서는 여자들을 태우고 어떤 집으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이용수: 그 안을 들여다보니까 이 쪽에는 큰 방이 있고 다른 쪽에는 칸칸이 방이 하나씩 있었는데 방문 앞에 담요를 가지고 문을 만들어 났어요. 한 다섯 개 쯤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너무 어리다 보니 언니 하나가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들어가니까 다락이 있는데 다락에 감추어 주었어요.

하지만, 얼마 후 일본군인에게 들켜 자신을 숨긴 그 언니와 함께 죽도록 맞았다고 말합니다.

이용수: 그 언니를 칼로 위협하며 베면서 눈에서도 검은 물 같은 것이 나왔는데 그것이 피 고 눈이 많이 상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막 겁이 나서 나왔어요. 그런데 그 군인이 나를 칼로 옷을 막 베더니 옷을 벗겨 말아서 입을 막고 몽둥이로 막 때려서 많이 맞았어요. 그러더니 군인이 담요를 가지고 언니와 둘을 덮어 씌워놓고 군화발로 밟으면서 칼인지 무언지 그것으로 찍으면서 죽인다고 그랬습니다. 저를 감추어 주었다고...

이 일본 군인의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이용수 할머니는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다고 말 합니다. 왜 무엇을 용서해 달라고 했는지조차 모르면서... 그러고 나서 겁탈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용수: 용서해 달라고 막 빌었죠 그런데 그 곳에 의자가 하나 있더라구요 거기에 앉히더니만 칼로 허벅지를 막 찌르고 그리고 발길로 차고 해서 막 피가 나고 그랬어요. 저는 아픈 줄도 모르고 자꾸 빌었어요. 말 들을테니 용서해 달라고 듣는다고 했는데도 조센징 너 죽인다고 하면서 무언가 가지고 오더니 손목 이쪽에 하나감고 또 다른 쪽에도 감고 이래가지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데 막 몸이 떨리더라구요 그때 내가 참 크게 ‘엄마~~~ 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귀에서 그 소리가 나고 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렇게 무자비하게 매일 2년 동안 성폭행을 당했고, 그 같은 끔찍한 생활은 전쟁이 끝난 뒤 자신이 17살이 된 때에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까지만 해도 자신이 끌려가 일본군들로부터 매일 성폭행을 당한 곳이 어느 곳인지 조차 몰랐는데 바로 전쟁이 끝나기 얼마 전에 한 군인으로부터 배운 노래에서 자신이 잡혀있던 곳을 알게됐다고 합니다.

이용수: 그 군인이 밤에 노래를 가르쳐 주었는데 노래가 전폭기는 떴는데 대만은 멀어진다 쿵덕 쿵덕 구르는 소리에 아무도 배웅해 주는 사람이 없지만 단 울어줄 사람은 요시꼬 한 사람 뿐이다. 2절은 전폭기는 떴는데 신죽은 멀어진다고 했습니다. 이 노래가 5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신대 대책 협의회 신고하고 나서 아세아 연대를 했을 때 거기가 어디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용수 소녀가 목숨을 건채 강제로 위안부 생활을 했던 곳은 대만에 있는 신죽으로 지금은 신죽 공군기지가 들어서 있는 곳입니다. 이 영수 소녀는 처녀가 되어 예전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용수: 전쟁 끝나고 18살 46년도에 나왔습니다. 나오니까 엄마 아버지가 다 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밤에 갑자기 없어졌으니까 죽었다고 제사지내고 있었고 엄마하고 불렀더니 귀신이 왔다고 귀신이 되어 왔다고 엄마가 까물어쳤어요. 엄마가 정신이 들더니 저를 막 물어뜯고 아니라고 결국 엄마도 병원에도 갔지만 멍하니 자기 정신이 들지 않아...

집안도 풍지 박산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일본군에 더렵혀진 몸 이라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치욕스러운 과거의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만 했다고 한숨지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강제 위안부 문제가 불거지면서 정신대 할머니들이 한 두 사람 한국의 정신대 문제 대핵 협의회에 신고를 하게 되었고 그 할머니들이 지금 16년째 매주 수요일마다 한국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갖고 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지난 6월 말 미국 연방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용수: 저는 워싱턴의 가서 청문회를 여는데 무언지도 모르고 참 반갑고 고맙고 그래서 갔습니다. 거기서도 증언도 했고 결의안이 통과 되었다는 신문 지상의 소식을 듣고 밤에 한잠도 못 잤습니다. 나갔다 들어갔다 하면서 하나님 보고 기도도 하고 고맙다는 생각에 정신이 들떠 잠이 안 옵디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제 위안부 결의안이 미국 연방 하원 본 회의에서 통과가 되어 일본 정부가 공식 사죄하고 공식 배상을 해야 하며 꼭 그렇게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