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이렇게 말하고 보니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본 게 언젠지 모르겠네요... 천리 길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이라도 손으로 얌전히 써내려간 그 사람의 편지를 받아들면 바로 옆에 있는 것 마냥 느껴졌었는데요..
남북 문화 기행 이 시간엔 ‘편지’ 얘깁니다.
“말 없이 건네 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 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남쪽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던 어니언스의 ‘편지’ 라는 노랩니다.
노랫 말이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 이렇게 이어지는데요, 아무래도 전해진 편지는 연애 편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편지 하면 연애 편지 얘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 들킬세라 비밀스럽게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연애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요, 연애 감정을 통제가 있는 북한 사회에서도 통했습니다. 탈북자 김태산씨의 말입니다.
“내가 뭐 예전부터 연애 편지를 한번도 못 받아 봐서 인생을 잘 못 살았나 이런 생각도 들지만 ( 웃음 ) 일하던 데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잤으니까 친구들꺼 오면 가로채서 보고… 어렸을 땐 그런게 참 재밌었어요.”
또 이 연애 편지는 내 편지보다도 남의 편지 훔쳐보는 것이 더 재밌었습니다. 간지럽다고 웃으면서도 속으로 부러운 마음이었을텐데요.. 그렇지만 이런 편지 받는다고 좋기만 한 일은 아니죠. 답장 한번 쓸려면 공책 한 권 달아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또 연애 편지는 좀더 예쁜 종이에 쓰기도 하고 좋은 향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남자가 여자한테 편지를 보낼때는 어린 동생들 보내고 여자도 자기 아래 합숙 호실에서 제일 나이 어린 동생을 부추켜서 보내고...”
인 민군창건절인 낀 4월. 북한 학생들 꼭 하는 것이 있다는 데요. 바로 위문 편지쓰기인데요. 남쪽도 북쪽과 같이 학생들이 위문 편지를 씁니다. 틀린 것은 남쪽은 국군의 날이 아니라, 가족 생각 제일 많이 나는 연말 연시에 “국군 아저씨께”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쓰곤했습니다.
“회답이 한번 오는 경우에는 그게 큰 자랑이었는데.. 근데 꼭 여자 이름만 회답을 해줘요. 남자 이름으로 간 편지는 안 해준다고.. (어 한국이랑 같아요) 아 그래요? 그런거 보면 진짜 같다니까…”
또 편지는 대도시보다는 전화도 닿지 않고 사람 왕래가 많지 않은 시골 산골에서 더욱 애타게 기다렸는데요.. 요즘 남쪽엔 연애 편지, 위문편지 또 시골 촌노가 기다리던 아들의 편지가 모두 옛일입니다.
서울 광화문 우체국.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 우체국 3층, 집배실에서 33년 동안 집배원(우편 통신원)으로 일해온 김동열 집배 실장을 만났습니다.
“안녕하세요 김 실장님이시죠?”
칸칸이 나뉘어진 선반 앞에서 우편 배달 준비가 한창인 배달 준비실. 우편 배달을 마치고 정리가 한창인 이곳엔 여기저기 우편 배달용 빨간색 오토바이가 눈에 뜁니다.
“예전처럼 걸어서 다니면서 하질 못해요. 소포가 많고 물량도 많은 뿐더러 무겁고…”
김 실장이 처음 고향인 충청도에서 서울로 올라와 우편 배달일을 시작한 것은 18살. 당시 배달 구역은 청와대 뒤편 청운동 옆 산동네였습니다.
하 루 종일 외지로 일하러간 아들 편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 편지를 받긴 했는데 글을 못 읽어서 읽어달라고 부탁하던 할머니, 전화도 귀하고 컴퓨터 이메일을 당연히 없던 그 시절. 유일하게 외지에서 소식을 가져다 주는 것은 편지요, 그 편지를 배달하는 건 우편 배달부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반갑고 가면 껴안고 손 잡고 고맙다,, 여름 더운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가면 아줌마들이 고생한다고 옷 벗으라고 물 퍼서 등목해주고. 진짜로! 그 당시만해도 서울 올라가면 코베간다고 했는데도 인심 좋았습니다. 서울에도 글짜 모르는 노인들이 많아서 대신 읽어달라고 하고 그랬죠.”
나쁜일이 있으면 같이 울어주고 기쁜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주는 정이 편지로 오가는 때였습니다.
그렇지만, 80년대 전화가 보편화되고 90년대 휴대 전화에 인터넷 전자 우편까지 생기면서 편지 배달일은 많이 바꿨습니다.
“지금 저희 국 같은 경우 집배원 한 사람당 1900-2천 4,5백통 배달합니다. 예전에는 서신, 소위 말해서 상대방에게 직접 써서 보낸 안부 소식이 주종을 이뤘는데 요즘은 DM 물 이라고 해서 금융권이라든가.. 모두 상업 우편물이에요.”
사 실, 배달하는 편지 양은 예전에 비해 늘어났습니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이같은 배달하는 편지 양이 점점 늘어나서 최고점을 찍고, 요즘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지만 여전히 편지는 넘쳐납니다. 문제는 이 편지들이 손으로 써내려간 기다려지는 연인의 가족의 친구의 소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배달해주고 우편함에 집어넣으면 찾아가질 않아요.. 주민 만나서 왜 안 찾아가냐하면 아니 그 안 봐도 다 아는 걸 왜 가지고 나가 그런다고...”
이 처럼 남쪽은 이제 편지의 역할은 점점 옅어지고 편지 보다 빠르고 편한 소통 수단이 속속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인터넷 이메일이라고 불리는 전화 우편입니다. 인터넷 망에 자신의 주소를 만들고 컴퓨터 사용자 간에 편지나 여러 정보를 주고받는 새로운 개인 통신방법인데 업무용, 개인용으로 널리 사용됩니다.
서울에 앉아있는 제가 책상 앞에서 이메일을 보내면 지구 반대편 나라에 있어도 몇 분 안에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컴퓨터 파일로 된 사진이나 여러가지 문서들도 첨부할 수 있고 보내는 데 돈도 들지 않습니다.
그 러나 이런 기술 발달이 편지만 비켜간 것은 아닙니다. 컴퓨터 기술이 편지 배달에 적용돼 등기 우편 배달시 받은 사람 서명은 종이가 아닌 컴퓨터로 관리되고 배달 시간도 빨라져서 산간 벽지나 제주도 라도 주소만 제대로 적으면 2일이면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술이 발달해도 단 한군데 편지를 보내지 못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북한입니다.
얼 마전 남북 이산가족들이 교환한 영상 편지입니다. 손으로 쓴 편지가 아니라 영상을 찍어 CD에 담겨온 영상 편지. 이 영상 편지를 추진하기 위해 남쪽 정부는 북한 측에 몇번을 요청해야 했고 영상편지 내용의 언론 공개를 놓고 줄다리기를 해야했습니다.
60년을 북한 가족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기다려온 어르신들이 이렇게 편지 한장 주고 받는 것이 어렵다니요. 미국까지도 3일이면 편지가 가는 세상에 말입니다.
또 이런 이산가족들 뿐 아니라 남쪽에 있는 탈북자 만명도 북쪽 가족에게 편지 한장 보낼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탈북자 김태산씹니다.
“한국에 나오니까 참 고달픈게 그 중에 편지를 할 곳이 없다는 게 슬픈일이에요. 보낼때도 없고 받을 때도 없어요.. 쓸곳도 받을 곳도 없다는 없다는 게 격어 본 사람 아니곤 몰라요.. 이 지구상 어디서라도 끝에서 끝에라도 편지를 오고 가는데 승용차를 타고가면 5시간 들어갈 집이 평양에 있는데도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남북이 서신을 자유롭게 왕복할 수 있는 날, 그날은 저도 손으로 편지를 한번 써봐야겠습니다.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들으면서 남북 문화 기행 편지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