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우리에겐 이미 과거로 돌려보내주는 기계는 있습니다. 여러분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 기계… 바로 사진기입니다.
사진기로 찍은 사진 속 어머니는 주름살 하나 없는 풋풋한 아가씨고 지금은 허리가 굽으신 할머니도 꼿꼿히 서 계시니, 우리를 과거로 돌려보내주긴 하는 거죠.
남북 문화 기행 오늘 시간엔 이런 사진기와 사진에 대한 얘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서울, 이현주 기자입니다.
남쪽엔 익숙한 시골 풍경이 있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에 걸려있던 오래된 사진 틀.
사진 틀 안엔 손바닥 만한 크기의 사진들이 골고루 모아 붙여져 있었는데요.. 벌써 몇 십년전 세상을 뜨신 부모님 사진부터 아이들 어릴 적 사진, 또 학교 졸업식 사진에 갓 태어난 손주들 사진까지.
사진 뒤에 댄 하얀 종이가 쪼글쪼글 노랗게 된 이 오래된 사진틀은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일어설 때마다 ..방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항상 보이는 눈 높이 자리를 오랫 동안 지켰습니다.
사진이 귀하던 시절 얘기니 아마 북쪽도 이런 남쪽의 얘기가 낯설진 않을 것 같습니다.
한반도에 사진술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1900년대 들어서였습니다. 청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의 사진사들은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사진관을 차렸고요, 조선인으론 처음으로 김규진이라는 사람이 1910년, 지금으로 치면 서울 시청 근처에 천연당이란 사진관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진기 한대 값이 웬만한 기와집 한채 값보다 비싼 시절 이었습니다. 이 시절, 결혼식 돌잔치 환갑 같은 특별한 날에만 사진을 찍었고 사진기가 있는 유일한 곳은 시내에만 몇개 있는 사진관이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사진이었으니 전쟁 통에 나선 피난 길에도 사진은 피난 짐 속 깊숙이 들어있었습니다.
이 사진들은 모진 세월을 뚫고,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이제 노인이 된 사진 속의 주인공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아니면 사진 속의 주인공은 이미 가고 비슷한 생김새의 아들이나 딸 앞에 놓이기도 했고요..
비슷 비슷한 머리 모양, 어깨를 약간씩 틀어선 쭈욱 한 줄로 서서 찍은 단체 사진. 아마 북이나 남이나 이런 사진들은 사진첩에 한장쯤을 있을 텐데요, 사진이 귀했던 시절엔 친구들과 사진관에서 이런 사진 한장 찍는 것이 큰 낙이었습니다.
평양 출신 김태산 씨의 얘깁니다.
그때되면 친하지 않아도 막 친한 척하면서 어깨동무도 하고 말이야 ( 웃음 )
또 귀한 사진 한장 박는 날은 어떻게든 잘 나오려고 까치발을 들고 찍기도 하고 거울 보면서 웃는 연습도 꽤 했습니다.
서울 목동에 사는 48살 이애경 씨도 이 시절 사진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친구들끼리 어깨에 똑같이 손을 얹는다던지 단발머리에 똑같이 웃어서 지금보면 쌍둥이들 같애요. 열명씩 쪼로록 이렇게 웃으면서 있는 걸 보면 너무 귀엽고 천진 난만하고.. 그런 사진을 지금보면 아..참 그때로 가고 싶지만 아 참 좋을 때였죠…
이제는 보기 힘든 흑백사진 시절의 얘기들입니다.
지금은 '사진' 하면 당연히 총천연색 사진을 떠올립니다. 총천연색 사진이 남쪽에 처음 등장한 건 1970년대 말이었습니다. 천연색 사진이 처음 나왔을 땐, 다들 눈이 튀어나올 만큼 신기해 했는데요. 이애경 씨의 말입니다.
처음에 칼라 사진 나왔을 때는 너무 놀랐죠. 지금은 흑백 사진이 너무 귀해서 요즘 아이들은 흑백 사진을 보면 이게 무슨 사진이냐고 그럴 정도로 그래도 그 사진이 굉장히 귀했죠.
남쪽엔 이 천연색 사진이 등장한 시기부터 경제 사정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보리고개도 사라지고 먹을 걱정도 줄어들고 나니 가정 마다 한대씩 사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1988 , 서울 올림픽을 전환점으로 남쪽의 사진 산업은 크게 발전합니다.
이 시기엔 필름을 만든 회사, 또 사진기를 만드는 회사도 돈을 벌었지만 벌이가 제일 좋았던 것은 동네 구석 구석을 지켰던 사진관들이었습니다.
희망, 장미, 고려, 에덴, 고향.. 이런 이름이 붙은 동네 사진관들은 필름을 인화 현상하고 또 사진을 직접 찍어주기도 하면서 몇년 동안 큰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사진 시장의 판도는 90년말, 디지탈 사진기가 등장하면서 크게 바뀝니다.
디지털 사진기와 사진을 담을 수 있는 저장 장치, 사진을 뽑아 볼 수 있는 사진 프린터가 등장했고 필름과 필름 카메라, 필름을 현상해주던 사진관은 사라졌습니다.
문을 연지 8년째 되는 한 디지털 사진 인화 업체의 본사를 찾았습니다.
안녕하세요. 바쁘시네요.
제가 이 회사를 찾아갔을 땐, 사진을 뽑는 작업이 한참입니다. 디지탈 사진용 프린터를 이용하는 사진 뽑는 작업은 컴퓨터를 이용해 이뤄집니다. 단 5분이면 어떤 크기의 사진도 출력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컴퓨터에서 넣어놓으면 인식해서 뽑는 건데 사진 나오는 시간은 5분 정도 걸리나요? 지금은 뽑는데 업체간 경쟁이 심해서 200원 정도 합니다.
이 업체 관계자는 디지탈 사진기의 빠른 보급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래도 찍어서 바로바로 볼 수 있는 디지탈 사진기가 편한 겁니다. 급하면 전화기도 카메라가 있는 세상인데요. 찍어서 인화 현상하고 기다리는 필름은 불편하죠. 비용도 많이 들어가구요.
2007년을 기준으로 남쪽 한 가정당 디지탈 사진기 보급율은 60%를 넘어섰습니다. 개인으로 봐도 10명 중 5명 이상이 디지탈 사진기를 가지고 있고 남쪽에서 판매되는 거의 전 기종의 휴대전화에 디지탈 사진기가 부착돼 있습니다.
이런 디지탈 사진기의 인기는 북쪽도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평양에서도 최근 디지탈 사진기가 유행입니다.
지난 1월 남쪽에 정착한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평양 출신 김씨 성을 가진 탈북 여성은 대학생들 사이에 가장 갖고 싶어하는 것 1위가 바로 이 디지털 사진기 라고 밝혔습니다. 미화로 약 100달러면 평양 안에서 어렵지 않게 소니 디지탈 사진기를 구할 수 있을 정도고 정부 주요 시설이 아닌 대부분의 곳에서 사진을 찍는 대가로 돈을 내고 사진을 자유롭게 찍을 수 있다고 전했는데요.. 물론 이건 평양에만 국한된 애깁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지역에선 결혼식에 사진사 부르기가 하늘에 별따기고 사진 한장 찍을 새 없이 생활은 돌고 돕니다. 김태산 씨의 말입니다.
사진관에 사진사 한번 데려 올라면 줄도 동원해야 해요. 차가 있으면 모셔라도 오지만 그마저도 없으면 뭐 못찍는 거죠.
'꿈을 찍는 사진관' 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6.25 전쟁이 막 끝난 시절, 강소천 씨가 발표한 작품인인데요, 이 동화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인공은 어릴 때 같이 놀던 북쪽의 순이를 그리워합니다. 주인공은 꿈을 찍는 사진관으로 찾아 가는데요.. 주인공의 꿈을 찍어 놓은 사진엔 이젠 스무 살이 넘었을 순이의 모습은 아직 열두 살 그대로 입니다.
추억 속의 모습은 언제나 마지막 본 그 때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겁니다. 강소천 씨의 동화엔 항상 꿈, 고향, 그리움이 등장하는 데요, 아마 강소천씨가 이북 출신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남쪽에도 이런 꿈을 찍는 사진관에 가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북쪽을 떠날때 가족 사진 한 장 제대로 챙겨 나오지 못한 탈북자들인데요, 이 분들에게 이런 사진관이 있다면 그리운 북쪽 가족의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김태산씨 입니다.
"나올 때 사실 사진은 하나도 들고 나오질 못했어요. 서울에 와서 가족 사진을 찍었는데 당시 2살이었던 막내 둥이 사진만 넣곤 나머지 애들 사진은 넣질 못했죠.
남북 문화 기행, 사진 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중 '사진처럼'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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