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북한에도 그렇게 매섭던 겨울 추위가 물러갈 준비를 하고 있겠죠? 이곳 워싱턴 디시에는 화사한 벚꽃이 곧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습니다. 이런 봄소식과는 달리 중국의 탈북자들의 강제 북송 반대운동 소식이 계속 날아들고 있습니다.
cut: 30 여명을 강제 북송하한다고 하고 50여명의 북한 공안원을 중국에 탈북자들을 잡기 위해 파견한다는 더 악화된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너무 장기화 되는데 이런 안타까운 비극이 어디에 있어요?
미국 뉴욕에서 12년째 탈북난민 돕기 자선 음악회를 열고 있는 음악인 서병선 씨는 요즘 상황을 보면서 탈북자 문제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답답해합니다.
탈북 당사자인 남한에서 목회를 하는 최바울 목사는...
최: 저 자신이 온 가정을 다 잃고 온 사람입니다. 저는 아들 4형제 딸 하나였는데 맏형님 하고 저밖에 안 남고 둘째 형님하고 두 동생하고 어머니는 굶어 돌아가셨습니다.
여성시대, 오늘은 탈북 민 최바울 목사와 25번째 탈북난민 돕기 자선음악회를 준비하는 뉴욕의 예술가곡연구회 서병선 회장으로부터 탈북자들의 강제 북송에 얽힌 얘기를 들어봅니다.
서병선 회장은 오는 5월 탈북난민돕기 자선음악회를 앞두고 12년째 음악회가 계속될 줄은 몰랐다며 음악회를 처음 열고 중국의 탈북자들의 현황을 직접 보면서 음악회를 계속 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서: 제가 2000년도에 중국현장에 가서 그 골짜기 마다 탈북여성들이 팔려가 있는 상황을 보고 탈북자들의 고난, 혀에 철사를 꾀어서 7-8명씩 줄줄이... 발발 떠는 처절한 모습을 증언자들의 얘기를 통해서 듣고 돌아 와서 일주일 동안 한잠도 못 잤죠. 그런 현장을 직접 갔다 오니까 죽는 날 까지 이 일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꽉 차더라고요
서울에서 평양, 평양에서 예루살렘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라는 표어를 걸고 통일 한국교회를 꿈꾸는 탈 북민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역자들의 모임인 탈북 민 교회 연합회의 최바울 목사는 60여명의 교인을 이끌며 목회현장에 있습니다. 이중에는 탈북하다 강제북송을 당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교인들이 대부분이라는데요,
최: 저희 교회에 쌍둥이 자매가 있는데 동생은 여기와 있고 하나는 북한에서 감옥에 갇혀 있고 그 어머니는 북한에 두고 온 딸 때문에 혈압이 터져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그런데 이런 사정이 이 사람하나 뿐만 아니라 탈북해서 나온 우리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가 자제를 북한에 두고 온 것이 아니면 남편이나 아내 부모를 두고 오고 이런 형편이라는 말이죠.
최 목사는 자신도 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에 이들 교인들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위로 할 수 없다며 신앙으로 어려움을 이기고 소망을 갖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고 믿음이 들어갈 때는 그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소망으로 바뀌는데 믿음이 없을 때는 지금까지 당한 것 너무나 가슴 아픈 것은 사람의 말로 위로가 될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포자기 하는 분들을 볼 때 안타까워요.
최 목사가 북한에서는 자신이 탈북자가 되리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그는 잘나가는 민경부대 소속으로 비무장지대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
최: 저도 군복무를 하면서 미군 헌병들하고 직접 코를 맞대고 있었으니까 미국이나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북한에 있는 저희 친척들과 가족들이 다 나름대로 김일성 김정일에 충성하다 보니 나하나 때문에 가정이 망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탈북하지 못했고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북한에서 민경은 성분이 좋은 사람들로 선발, 배치하고 모두 입당을 시키며 제대 후에는 대학도 우선적으로 추천해 주는 등 특혜를 받기 때문에 군복무를 마친 뒤에 곧바로 간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최: 북한에서 간부와 노동자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늘과 땅차이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간부가 되려면 표준이 무엇이냐 하면 제대군인이어야 하고 당원이 되어야 하고 대학을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부대에서 복무 했느냐가 중요하고 다행히도 제가 군 복부한데는 김일성이 민경에서 7년 이상 복무하면 준비된 사람으로 보라는 이런 교시를 했기 때문에 민경에서 제대된 사람은 큰 간부든 작은 간부든 모조건 간부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 덕에 저도 청년 조직을 책임진 간부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간부는 높은 사람에게는 아첨하고 아래 사람은 짓밟고 갈아치울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하는군요.
최: 간부가 무엇입니까? 김일성이 아 하라며 밑에까지 무조건 아 해야지 야 했다면 없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저 역시 자기에게 아첨하고 자기 입에 맞춰주는 사람을 밑에 청년 일꾼들을 둬요. 만약에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자기에게 잘 안 맞추어 주면 갈아치기 하는 거죠.
최바울 목사는 민경대 제대 후에도 북한에서는 아주 좋은 자리로 배치되었다는데요, 어떤 자리였는지 설명 들어보죠.
최: 사실 군복무 하면서도 먹고사는 대는 전혀 걱정이 없었고 제대해서도 총국 수산총국이라고 하면 북한말로 고양이 뿔 내놓고 없는 것이 없는 곳입니다. 전화 한통이면 밑의 수산사업소에서 예물을 가져다 바치고 어떻게 잘 보이려는 권력 단입니다 총국자체가... 청년들만 13만 명의 조직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았지만 젊은 시절의 그의 야망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더 큰 간부가 되기 위해 평양으로 진출합니다.
최: 북한에도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 에 따라 큰 간부 할 수가 있고 작은 간부 할 수 있어요. 제가 나온 공산대학 자격증 가지고는 큰 간부를 못합니다. 도 급에서 지방의 군이나 시에 가게 되면 부장 급밖에 올라가지 못하는 자격이고 평양에서 대학을 나오면 김일성 고급 당 학교라든가 이런 데를 갈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다 약속을 하고 평양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내 어머니가 풀을 뜯어 먹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도 못했습니다.
최 바울 목사는 남자 형제 3형제는 모두 평양에서 살았습니다. 고향에는 부모님과 여동생이 살았는데 가족들을 물론 심지어 어머니마저도 아들 3형제가 사는 평양 집에는 올 수가 없었다고 하네요.
최: 아들 딸 낳고 아들 3형제가 모두 평양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 아버지는 평양구경을 못해보고 돌아가셨어요. 왜냐하면 노동자는 아들집에도 못갑니다 평양에... 손자 보려고도 못가고
이런 상황에서 최 목사는 식량난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부모님을 뵈러 고향으로 간 것이 그만 화근이 되고 말았습니다.
최: 고향에 휴가차 함경북도 쪽으로 왔다가 기차가 보름동안이나 다니니까 차가 가다가 서고 언제 갈지도 모르고 있다 보름이 걸렸어요. 그때 기차 안에서 너무나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남의 무릎에다 애기를 앉혀놓고 화장실 갔다 온다고는 버리고 부모는 달아나고 그리고 길바닥에 시장에 쓰러진 애들도 보고 너무 가슴 아픈 것을 많이 목격했어요.
이런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고향에 와서 또 놀란 것은 부모님들이 풀로 연명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최: 고향에 오니까 한 끼도 먹을 것이 없어 풀 뜯어 먹는데 저도 어쩔 수 없이 같이 풀을 뜯어 먹기 시작해서 넉 달 동안 풀을 먹었어요.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고...
당시 최 목사는 고향에 다녀온 뒤 배치를 받아 일 할 곳 은 뇌물도 많이 들어오는 좋은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최 목사 역시 부모님들과 풀을 먹을 수 밖에 없어 건강까지 위협을 받았습니다.
최: 도급의 간부 부 5과라고 하면 도의 간부들을 배치하고 이동시키는 굉장히 좋은데 있어요. 그랬는데 거기 가서 일도하기 전에 휴가차 왔다가 그런 꼴을 당해가지고 넉 달을 풀을 뜯어먹고 제가 건강한 나이인데 10년 동안 특공 무술을 배운 사람인데도 먹지 못하니까 지팡이를 짚고 다녔어요.
그러던 중 풀을 뜯다 쓰러진 어머니를 자신의 힘으로 업지도 못하고 질질 끌다 시피해서 집에 모셔다 놓고 여동생하고 어머니보고 잠깐 다녀 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최: 어머니가 아무래도 네가 올 때 까지 못 견딜 것 같다고 하셨어요. 저는 중국 간다는 말 할 수도 없었어요. 그때는 어머니가 죽으면 죽었지 못 하게 하니까 그래서 중국에 탈북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식량을 구해가지고 다시 가려고 탈북하다 군인들에게 들켜 싸움이 붙다 보니 북한에 도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최 목사는 결국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탈북자로 몰렸고 식량난 속에서 큰형님과 자신만이 살아남고 모든 가족을 잃었습니다. 최바울 목사 경우같이 대부분 굶어 죽을 수 없어 북한을 탈출한 인민들을 북한과 중국은 불법 월경자로 몰아 지금도 많은 탈북자들이 강제 북송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탈북난민 돕기 자선음악회를 계속하고 있는 뉴욕의 서병선 회장은 해마다 2번씩 계속되는 음악회에서 동포들의 뜨거운 사랑으로 감격해 합니다.
서: 그동안 구출한 탈북자들이 100명이 훨씬 넘죠, 지난 24회 음악회 때는 14.000 달러를 모금했으니까 동포애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보여줄 때 감동하고 감사하죠.
자신도 자선음악회 때 마다 출연하는 서 회장의 꿈은 더 많은 탈북자들이 자유를 찾아 그 들의 아픔을 이겨내고 세계의 보통 사람들과 같이 열심히 살아가는 기쁨을 보는 거라고 말합니다.
서: 북송되었다 지금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 가명의 데보라 라고 얼마 전에 결혼했고 간호원 지망자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또 나오미 있죠 지금 한국으로 가서 교회 나가면서 탈북자 지원단체 두리하나 사역을 열심히 돕고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요.
서병선: 그리운 금강산
지난 자선음악회 때 서병선 회장이 불렀던 우리가곡, 그리운 금강산 들으면서 여성시대 마칩니다.
RFA 이원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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