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탈북여성이 꼭 해야 할 일

워싱턴-이원희 leew@rfa.org
2015.06.11
nkhr_exhibition_305 지난 3월 파리 에펠탑 앞에서 재불조선난민회 첫 행사로 열린 북한인권도서전.
사진-아리랑 제공

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얼마 전에 프랑스 에서도 탈북자 단체가 꾸려졌죠. 재불조선난민회, 프조회입니다. 이 단체의 가명 김선미 회장은 프랑스에 합법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영주권자로, 새터민 여성지도자로써, 북한인권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프조회 회장 직을 맡았다는데요, 특히 김 회장의 친동생은 탈북 과정에서 체포되어 정치범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지금 6년 넘게 소식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선미 회장의 음성을 변조합니다.

김: 프랑스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의 인권을 위해 일을 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또 제 동생을 한국으로 데리고 오려 하다 잘못 되어서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갔어요.

김선미 씨는 자기 동생뿐만 아니라 많은 탈북자들의 가족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어느 곳에서 몇 년을 살아야 하는지는 물론 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습니다. 오늘 여성시대에서 전해드립니다.

음악:

김선미 회장은 탈 북한 가족으로 인해 또는 탈 북 과정에서 불법으로 체포된 사람들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는 또 세계보편 적인 인권에서 보면 가혹하다고 할 만큼 큰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며 더구나 재판도 없이, 부모에게는 통보조차도 없이, 아무런 절차 없이 한 목숨을 그렇게 가져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처사라고 항변 합니다.

김: 동생이 2009년도에 잡혔으니까 5년 형기를 받고 들어갔다고 들었거든요 지금 5년이 훨씬 넘었잖아요, 동생이 당시 20살도 채 안됐었어요. 그 동생이 거의 20대를 감옥에서 보내고 있는데 북한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갈 때 재판도 없이 들어가요 그리고 부모님들에게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보도 안 해 주고 몇 년을 받았다는 것 자체도 얘기를 안 해 준데요. 5년 형기를 받았다는 것도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이건 너무 무자비하거잖아요 국가가 폭력을 써도 선진국에서 보면 법적으로 이렇게 쓸 수는 없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제 주변에 한 둘이 아니에요.

한국을 비롯한 세계각처에 있는 탈북자들의 가족들이 이런 고통을 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북한 당국은 세계를 향해 북한에서는 이런 일이 없다며 너무 뻔뻔한 거짓으로 일관하고 있어 가족들이 나서 세계에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김: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 운동을 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북한에서는 계속 반박하고 자기네는 아니라고,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간 사람들의 가족들이 이렇게 있는데 ... 저 같은 경우도 동생의 이름이나 나이 또 잡혀간 날자 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거든요 사실 이런 명단을 입수해서 국제적으로 압력을 넣지 않으면 인민들이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잖아요 지금 남한에 계신 새 터 민들의 가족들이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서 고통을 당하고 있고 그들에 대한 생사를 전혀 확인할 방법이 없는데도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유엔에서 인권 문제로 인한 재제를 하려고 하니까 오리발 식으로 그런 일이 없다고 하잖아요.

김 회장은 북한의 오리발 식 작전이 통하지 않도록 피해 가족들은 증거를 철저하게 수집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증거도 거부하는 이들에게 주먹구구식의 대응이 아닌 증거를 통한 대응 전략을 써야 한다고 강조 합니다.

김: 북한 사람들이 인권 운동을 한다고 하면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살인을 하고 법적으로 판결을 받으려면 증거가 필요한데 인권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말로 아무리 정당 하게 얘기를 해도 북한은 들어먹지 않아요.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이미 벗어났는데 한국에 살면서도 북한을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들은 한국에 살면서도 북한에 살고 있는 거예요 아직,

김선미 씨는 탈북한 가족 때문에 잡혀 갔거나 아니면 가족의 구출활동 실패로 잡혀간 탈북자들의 가족들이 힘을 모아 북한 측에 그들의 안전을 공식적으로 요구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혹은 북한 대사관으로 달려가 위험을 무릎 쓰고 일인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는군요

김: 위험하죠, 하지만 혈육이 이렇게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위험한 것이 뭐 있겠어요, 동생을 제가 키우다 시피 했어요. 그런 동생이 19살에 스무 살도 안 된 애가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 수년 간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사는데 언니로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죄책감을 느끼고 좋은 옷을 입어도 죄책감이 들어요. 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어요, 지금 프랑스에 이렇게 나와 있으니까 저희는 남북한의 중립 위치에 있어요. 그러니까 북한 대사관에 가서 일인 시위라도 하고 싶었어요. 제 동생이 살아 있는 지나 알려달라고요.

선미 씨는 이렇게 프랑스까지 온 이유는 프랑스가 유엔 안보리 이사국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지구상에서 가장 열악한 북한의 인권상황을 프랑스 사회에 알리며, 구금 상태인 가족의 생사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김: 프랑스가 유엔에서 만만치 않은 위치에 있으니까 이런 인권 문제는 꼭 해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권 유린의 가장 큰 피해자가 탈북자들이거든요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북한 사회 밑바닥에서 얼마나 고생하고 살았는지 몰라요. 그래서 이렇게 프랑스까지 왔는데 저 같은 경우는 직계가족이 그렇게 되어있고 또 인권 유린의 최전방에 있으니까 그리고 제가 한국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공부를 했고 그래서 그에 대한 감사함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북한의 인권 문제에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김선미 회장은 이제 프조회를 이끌어가기에는 짧은 기간이라 아직 현황 파악을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 배우며 함께 해 나갈 것이라고 자신을 보입니다.

김: 프랑스는 지금 초창기이기 때문에 합법 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20-30 여 명 된다고 들었는데 정확한 숫자는 아닙니다.

지난 2004년도에 중국으로 탈출해 몽골을 지나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간 김선미 씨는 어린 나이에 탈출을 했지만 다행히 그 당시 국경경비가 느슨했던 때라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군요.

김: 2004년도 그쯤에 국경경비가 느슨했었어요. 지금이랑 많이 달랐어요. 저도 강에서 수영하다 건너갔어요. 그리고 별다른 제재 없이 중국 안쪽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중국에서 몽골로 탈출해 초원을 지나오면서 대 자연의 무서운 경험을 잊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나이가 어려 같이 탈출하는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 비교적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김: 저희가 강가로 움직여 식수 문제는 괜찮았는데 사람이 안 사는 곳 이었어요. 초원 주변이 사람이 살아야 도움을 받고 넘어갈 텐데 저희가 3-4일 이동을 했는데 결국에 사람을 찾지 못 했어요 어쩌다가 군인들만 발견했고, 안내 하시는 분이 중국에서 변경 역까지 데려다 주고 나침반을 주었어요. 그때 제가 나이가 가장 어렸었어요. 그래서 같이 탈출하는 언니 오빠들의 보호를 받았어요.

선미 씨가 북한을 탈출 한 것은 배고픔에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했었고, 풍요로울 것 같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어린 나이에 홀로 북한을 탈출 할 용기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김: 내가 나진 선봉지역을 자주 다녔어요. 그곳에서 중국 사람들도 보고 하다 보니 세계에 관심이 많이 갔어요. 북한을 벗어나면 좀 더 큰 세상이 있고 밖의 세상이 여기보다 풍요롭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어요. 그리고 저는 가정환경도 좋지 않았고 제가 거기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어요.

그는 한국에서는 많이 외로웠지만 대학을 다니며 시간제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다 보니 노력에 대한 대가는 결실이 되어 그의 손으로 돌아와 이런 것이 자본주의 구나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관문이 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데요,

김: 자유에 대한 대가가 우리에게 분명히 있어요. 자본주의에 왔다고 해서 그냥 생기는 것은 없고 자기가 노력한 만큼 결과는 보상 받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배고픔은 해결했는데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이 꿈 이라든지 이 상황에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든지 일단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데 취업이 잘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공부를 계속 하려고 하니까 한국에서는 더 이상 공부하는 것이 어려운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한국에 들어와서 대학을 다니던 중 만나게 된 프랑스인 남편의 도움을 받아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하겠다는 부푼 꿈을 갖게 되었다고 하네요.

김: 프랑스 책도 많이 읽고 특히 프랑스 역사도 관심이 있어 책을 많이 읽다 보니 프랑스에 가서 공부도 하고 싶은 생각에 왔어요

선미 씨는 프랑스에 정착을 원하는 탈북자들도 많다며 그들이 어떤 경로로 프랑스에 오던 정착을 돕고 아울러 동생의 문제와 함께 북한의 인권 실상을 프랑스에 적극 알리겠다는 계획도 세웁니다. 얼마 전에는 파리 에펠탑 광장에서 북한관련 도서 전시회가 열렸었는데 프랑스 사람들의 많은 관심도 받았다고 전합니다.

김: 프랑스에 정착하려는 북한 난민들의 정착 과정 그리고 언어 문제도 돕고 싶고 그리고 언론에 비쳐지는 북한이, 인권 쪽으로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세계에서 북한은 인민들이 힘들게 사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자유가 없고, 이런 북한의 인권 문제를 프랑스 사회에 알려주고 싶고 프랑스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동생과 함께 비슷한 처지에 있는 탈북자들의 가족을 위해 함께 연대하며 활발한 운동을 하겠다고 김선미 회장은 다짐합니다.

김: 프랑스에서 자리를 잡으면 동생 구명운동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음악 :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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