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한국 해병대의 산 증인 공정식 장군 별세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1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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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병대의 산 증인이었던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이 별세했습니다. 공 사령관은 무수한 전투를 치르면서 평생을 조국수호에 바친 해병이었는데, 지난 10월 25일 숱한 6•25 전쟁 및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의 애도 속에 영면했습니다.

1947년 해군사관학교 1기로 졸업한 공 장군은 6·25전쟁 당시 해병대 주요 전투인 가리산 전투, 화천지구 전투, 도솔산 전투, 장단·사천강 전투 등에 참전했는데, 특히 도솔산 전투에서는 대대장으로 큰 활약을 했습니다. 도솔산 전투는 1951년 6월 4일부터 6월 19일까지 17일에 걸쳐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이 점령 중이었던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칠정리의 해발 1,148m인 도솔산을 혈전 끝에 탈환한 전투입니다. 도솔산은 강원도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태백산맥의 고봉들 중의 하나인데,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좌우편에서 북상 중인 한국군이 진격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군도 24개의 고지에 교통호와 엄체호를 구축하고 고지 전방에 무수한 지뢰와 부비트랩을 설치하여 난공불락의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김대식 대령이 이끄는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미 전함 미조리함의 함포, 미 해병 항공대의 항공지원, 미 해병 제11 포병연대의 포격 등 막강한 포격지원을 받으면서 2주간 치열한 육박전과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24개 고지를 모두 탈환합니다. 이 전투에서 한국 해병은 2천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많은 무기들을 노획했지만 아군의 사상자도 700여 명에 달했습니다. 산악전 사상 유례없는 대공방전이었습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이 승리를 기념하여 해병 1연대에게 부대표창을 하고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하사하는데 그것이 한국 해병대가 ‘무적해병’으로 불리게 된 효시였습니다. 이후 해병대는 ‘도솔산의 노래’ 라는 군가를 제정하여 그날의 기백을 후배 해병들에게 전하고 있으며, 양구에서는 매년 6월 도솔산지구전투전승행사가 거행됩니다.

6•25 전쟁 후 공정식 장군은 해병 제1연대장, 제6대 해병대 사령관 등을 역임하는데, 사령관 재직 시절에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해병 청룡부대를 창설하여 베트남전에 파병합니다. 청룡부대는 해병 제1사단 제2연대를 기반으로 하여 여단급으로 증편된 부대로서 1965년 10월 9일 베트남 캄란만에 상륙하여 1972년 2월 29일 부산항으로 귀국하기까지 7년 동안 숱한 전투를 치르면서 무적해병의 신화를 이어갔습니다. 청룡부대는 캄란 지구, 투이호아 지구, 추라이 지구, 호이안 지구 등을 차례대로 평정하면서 여단급 작전 55회, 대대급 작전 106회, 소부대 작전 144,173회 등 무수한 작전을 통해 베트콩 사살 9,688명, 포로 722명, 귀순 599명, 용의자 체포 3,065명 등을 기록하고 95척의 선박 및 수천 정의 무기들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또한, 민사작전을 통해 96만 8천여 명의 베트남 국민에게 의료지원, 학교 건설, 도로•교량•가옥 수리 등의 대민지원을 제공했습니다.

공정식 장군은 1949년에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해병대 창설을 건의했고, 1949년 8월에는 북한군의 미 군사고문단장 납치 도발을 응징하는 몽금포 전투에 참가했으며, 1•4 후퇴와 서울 재탈환 후에는 해병 제1전투단 부단장으로 임진강-사천강 지역 방어를 지휘하여 수도권 수호에 헌신했습니다. 해병사령관 시절에는 청룡부대를 창설하여 베트남전에 파병하는 주역을 해냈습니다. 군무를 떠난 이후 제7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세 아들을 모두 해병대에 입대시켰습니다. 공 장군이 창설한 청룡부대는 1981년 해병 2사단으로 증편되어 오늘날 수도권 서쪽 측방과 김포, 강화. 서북도서 등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공정식 장군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주역이자 산 증인이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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