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음악 다른 세상… 북한 예술단원 출신, K팝을 만나다

야외 공연장을 채우는 첫 곡이 흘러나오자 관객들의 기대 섞인 환호가 공연장을 뒤흔들었다.

한복을 개량한 듯한 하늘하늘한 옷을 맞춰 입고 등장한 6명의 남자 아이돌 그룹 ‘보이넥스트도어’(BOYNEXTDOOR)가 절도 있는 춤으로 무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귀에는 인이어를 끼고 한 손에는 마이크를 쥔 채 라이브로 노래까지 소화하고 있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객석에서는 멤버의 이름을 외치는 함성이 터져 나오고, 몇몇 관객들은 휴대폰 카메라로 무대를 촬영하기 바빴다. 16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방송(KBS) 뮤직뱅크 특별 생방송’은 가수들의 열정과 관객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오늘 이곳에 조금 특별한 관객이 있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자라 탈북 후 한국에 정착한 지 15년이 넘은 조미영씨다. 조씨는 “너무 잘한다”며 무대를 향해 감탄을 이어갔다.

조씨는 한국에 정착한 뒤 뮤지컬 배우, 아코디언 연주가 등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문화콘텐츠를 제작하는 주식회사 대표이자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북한에 있을 때부터 한국 가요를 좋아했다는 그는 북한에서도 주로 한국의 트로트를 들었고, 한국에 온 뒤에는 발라드에 푹 빠졌다. 가요 프로그램과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찾아 들을 만큼 음악이 일상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조씨가 음악을 좋아하지만 아이돌 가수가 많이 나오는 케이(K)팝 공연을 관람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생소하면서도 이색적이지만 가슴 벅찬 순간이기도 하다.

“TV에서 많이 봤는데 이걸 직접 눈으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거든요. 눈앞에서 이렇게 춤추고 노래 부르고 너무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 그렇게 움직이는 거 보니까 황홀하고...”

사실 조씨에게 무대는 낯선 공간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한때 도립예술단의 성악 단원으로 활동했다.

“북한에서 공연할 때는 늘 경직돼 있었어요. 예술인들은, 특히나 무대에서 하는 예술인들은 당의 목소리를 전한다라는 마음으로 공연했기 때문에 음악을 즐긴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무대 분위기가 바뀌고 “머나먼 별빛 저 별에서도, 노랠 부르는 사랑 살겠지”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가수 잔나비의 노래 ‘가을 밤에 든 생각’의 잔잔한 도입부가 흘러나왔다.

북한에서는 무대 위에서 노래를 선보였던 조씨가 오늘은 K팝을 즐기는 진정한 관객이 됐다. ‘잔나비를 좋아하느냐’고 묻자 그는 “내가 완전 좋아하는 그룹”이라며 “‘가을밤에 든 생각’이라는 노래를 너무 좋아한다. 서정적인 멜로디가 약간 북한 감성도 있는 것 같다”고 맞장구쳤다. 그는 노래를 조그맣게 따라 불렀다.

지난 1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특설무대에서 KBS '뮤직뱅크' 특별 생방송이 진행됐다.
지난 1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특설무대에서 KBS '뮤직뱅크' 특별 생방송이 진행됐다. 지난 1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특설무대에서 KBS '뮤직뱅크' 특별 생방송이 진행됐다. (RFA)

“내가 진짜 한국에 와 있다는 걸 실감해요”

오늘 공연에서 조씨의 눈길을 끈 건 무대 위 가수들만이 아니었다. 노래를 외워 따라 부르고, 가수의 이름을 외치고, 노래 사이사이에 약속된 구호를 외치는 팬들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지만,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런데 살아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더라고요. 팬들이 준비해 구호를 외치고 하는 것들이 이제는 다 이해가 됩니다. 저도 다음에 그런 거 하나 좀 알아와서 공연을 보면 좀 더 제대로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조씨는 오늘 가장 인상 깊게 본 무대 중 하나로 혼성 그룹 ‘올데이 프로젝트’의 공연을 꼽았다. 검은 의상을 입고 등장한 멤버들의 모습이 마치 전사 같아 멋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조씨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무대 뒤의 노력으로 향했다. 춤을 추면서 노래하는 가수들을 보며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지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도 예술인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그 역시 무대에 서기 위해 오랜 시간 음악을 배웠다. 하지만 같은 노력이라도 그 노력이 향하는 곳은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도 예술인들은 정말 스파르타 식으로 엄격하게 훈련을 시키거든요. 훈련량으로 치면 남북이 크게 다르다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한국은 그렇게 훈련해서 그게 다 내 기량이 되면 내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거잖아요.”

한국에 온 지 15년이 넘은 지금, 북한에서 예술 단원으로 무대에 섰던 그는 객석에 앉아 다른 음악과 새로운 풍경을 만났다. 그는 북한에서 항상 동경만 하고 볼 수는 없었는데 한국에서는 티켓을 예매하는 등 미리 준비만 하면 직접 가서 볼 수 있는 게 큰 차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에서 나와 한국에 정착한 이들에게 이런 경험은 단순히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했다.

“생생한 현장에서 느끼는 그 감동이 음원으로 듣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현장 가서 그 가수의 모습을 직접 보고 노래를 직접 듣다 보면 진짜 내가 한국에 와 있구나 라는 걸 많은 탈북민들이 느낄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 객석으로, 달라진 자리에서 만난 음악은 조씨의 시간을 다시 들려주고 있다.

에디터 이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