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 출신 청년, 부산에서 고향을 만나다

“바다를 보는 것도 좋아하고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온 것도 크고요. 그리고 바닷가 오면 뭔가 숨이 트여요. 그게 너무 해방감이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3일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을 찾은 최소연씨는 20살 때인 19년 전 떠나온 고향, 바다 도시 청진이 그립다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소연씨가 서울에서 2시간 40분 걸리는 케이티엑스(KTX)를 타고 굳이 부산을 찾은 이유다.

소연씨는 한국에 온 뒤 고향을 떠올리며 바다를 자주 찾았다. 한국에 와서 학업과 생계를 동시에 유지해야 하는 중압감과 자신의 말투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들의 시선이 버거웠다. 그때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힘은 고향을 닮은 바다 여행이었다. 이번에 그가 부산을 다시 찾은 것도 고향에 대한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해양관광도시 부산은 아름다운 바다와 풍부한 먹거리,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져 세계 각국의 관광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부산광역시가 집계한 관광 통계에 따르면 올해에만 벌써 393만 명 이상의 외국인 관광객이 부산을 찾았다. 미국 시엔엔(CNN) 방송은 부산을 ‘아시아의 차세대 해안 도시’로 소개했고, 글로벌 여행 플랫폼 익스피디아는 ‘2027 올해의 여행지’ 10곳에 한국 여행지 중 유일하게 부산을 선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연씨에게 부산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청진에서 가족들과 어죽을 끓여 먹던 바다, 친구들과 모래 장난을 하던 바다로 데려다주는 기억의 안내자이다.

고향과 닮은 광안리 해수욕장

광안리 해수욕장은 이날 흐릴 것이라는 예보와 달리 뜻밖의 맑은 하늘 때문인지 낮부터 해변을 찾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연인들, 단체 견학을 온 듯 보이는 학생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는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모두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다. 광안리 해수욕장은 푸른 바다와 화려한 광안대교 야경이 어우러지는 낭만적인 명소로 알려져 있다.

소연씨는 광안리 해수욕장의 바다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며 고향에서의 기억을 꺼냈다. 가족들과 함께 가마솥을 들고 나가 장작을 피운 후 고기를 잡아 ‘천렵’이라고 부르는 어죽을 해 먹었던 추억을 얘기할 때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친구들이 가디건을 그물처럼 이용해 바다에서 미역을 건져 올리던 장난도 떠올렸다. 특별할 것 없는 어린 시절의 놀이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다시 가질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에게 바다는 그리운 풍경인 동시에 상처를 위로받는 곳이다.

“고향이 그리워 청진으로 돌아가는 꿈을 꾼 적도 있어요. 그런데 꿈속에서조차 염색한 머리와 손톱을 꾸민 것을 보고 들킬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한 번만 가보고 싶기는 해요.”

부산 광안리 앞바다에서 요트 투어에 나선 탈북민 최소연씨가 야경을 감상하고 있다.
부산 광안리 앞바다에서 요트 투어에 나선 탈북민 최소연씨가 야경을 감상하고 있다. 부산 광안리 앞바다에서 요트 투어에 나선 탈북민 최소연씨가 야경을 감상하고 있다. (RFA)

화려한 요트 불꽃놀이… “꿈만 같아요”

해가 지자 광안리 바다 위로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밤하늘을 수놓은 광안대교의 화려한 불빛이 바다 물결과 함께 너울거렸다. 다리 위를 따라 길게 이어진 푸른빛과 보랏빛, 붉은빛과 황금빛의 조명이 어우러져 눈부신 야경을 만들어 냈다.

요트 승선장에는 야경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곳 역시 한국 사람보다 외국인 관광객이 더 많다. 소연씨도 요트에 탑승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청진 밤바다는 암흑 같았는데 부산 바다 야경은 화려하고 예쁘네요.”

소연씨가 요트 선상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바닷바람을 맞았다. 잠시 후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는 동안 소연씨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이 순간을 어린 시절 친구들과도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은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화려한 부산의 밤바다를 함께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건 진짜 꿈 같은 건데 꼭 한번 해보고 싶기는 해요. 친구들이랑 사진도 많이 찍고 이렇게 관광 같은 것도 해보고….”

화려한 불빛과 불꽃놀이를 즐기는 현재의 모습은 그가 살아온 과거와 흑백사진처럼 대비됐다. 북한에 있을 때와 달리 원하는 곳을 찾아가고, 밤바다에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지금의 일상이 고맙다고 했다. 그에게 자유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렇게 바다 위에서 불꽃놀이를 보고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평범한 순간에 담겨 있다.

부산 광안리 앞바다에서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는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요트 투어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부산 광안리 앞바다에서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는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요트 투어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부산 광안리 앞바다에서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는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요트 투어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RFA)

자갈치시장에서 떠올린 청진의 식탁

광안리 해수욕장 가기에 앞서 점심 무렵 자갈치시장에 들어서자, 수산물이 가득한 좌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뒤엉켜 시장 특유의 활기를 만들어 냈다. 상인들은 수조 속 펄떡이는 생선을 들어 보이거나 가격을 외치며 손님들의 시선을 끌기에 바빴다.

자갈치시장은 부산의 활기와 정겨움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전통시장이다. 싱싱한 해산물과 상인들의 구수한 부산 사투리, 넉넉한 인심이 어우러져 부산 사람들의 삶과 바다의 정취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소연씨는 시장 곳곳을 구경하며 얼음 위에서 튀어 오르는 생선들을 유심히 살폈다. 가자미, 갈치, 고등어, 오징어 등 눈에 익은 물고기를 찾아보는 모습이었다. 낯선 시장이지만 좌판에 놓인 해산물은 고향에서 자주 보던 것들이었다.

부산 자갈치시장을 찾은 탈북민 최소연씨가 좌판에 진열된 생선들을 살펴보고 있다.
부산 자갈치시장을 찾은 탈북민 최소연씨가 좌판에 진열된 생선들을 살펴보고 있다. 부산 자갈치시장을 찾은 탈북민 최소연씨가 좌판에 진열된 생선들을 살펴보고 있다. (RFA)

부산 시장에서 마주한 익숙한 해산물들이 청진의 식탁으로 그의 기억을 데려갔다.

“저희는 오징어라고 안 하고 낙지라고 했죠. 그래서 실제 여기 왔을 때 낙지가 문어 새끼인 줄 알았어요.”

그에게 오징어는 어린 시절 자주 접했던 먹거리다. 특히 말린 오징어의 입을 뜯어 먹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회에 대한 기억도 흥미롭다. 청진에서는 회를 먹을 때 양념을 곁들여 먹거나 무침으로 먹는 것이 익숙했지만, 한국에 와서 양념 없이 흰 살 그대로 먹는 회를 처음 접했다고 했다.

“청진에서 먹었던 해산물이 더 맛있었던 것 같아요.”

추운 곳에서 잡은 고기가 더 짜고 맛있다는 설명과 함께, 당시에는 배가 고팠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며 소연씨가 활짝 웃었다.

자갈치시장 좌판 앞에서 소연씨는 배고팠던 시절의 음식, 고향의 바닷가에서 보낸 시간을 다시 만났다.

감천문화마을에서 만난 고향의 기억

이날 아침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택시로 10분 정도 걸리는 감천문화마을을 찾았다. 산비탈을 따라 청록색, 분홍색, 하늘색 등 알록달록한 집들이 층층이 들어선 이곳은 부산의 대표 관광 명소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 삶의 터전에서 출발해 지금은 어린 왕자 벽화와 예술 작품이 가득한 문화예술마을로 거듭났다.

이날도 골목마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사진을 찍기 위해 걸음을 멈추는 사람들,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주는 사람들로 좁은 골목이 북적였다. 주변에서는 한국어보다 외국어가 더 자주 들렸다.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이 골목 곳곳을 누비며 부산의 명소를 즐기는 모습이다.

그 사이 골목을 천천히 둘러보던 소연씨의 시선이 한 집의 빨랫줄에 머물렀다. 빨랫줄 하나에 옷감이 서너 개 정도 걸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관광지 풍경 속에서 발견한 뜻밖의 익숙함이었다. 집들이 모여 있는 모양새는 다르지만, 골목마다 빨래를 널어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렇게 빨랫줄에 빨래를 널거든요. 북한도 똑같아요. 세탁기가 있어도 전기 때문에 잘 못 써요. 그래서 햇빛에 빨래를 말리거든요. 저런 것도 상당히 정겹네요.”

소연씨는 골목 곳곳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아기자기하게 이어진 집들과 골목길, 산 아래로 펼쳐지는 마을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청진과 부산, 두 도시는 모두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항구도시다. 하지만 소소한 익숙함을 빼면, 그가 느끼는 두 도시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부산 감천문화마을을 찾은 탈북민 최소연씨가 알록달록한 벽화로 꾸며진 골목길을 걷고 있다.
부산 감천문화마을을 찾은 탈북민 최소연씨가 알록달록한 벽화로 꾸며진 골목길을 걷고 있다. 부산 감천문화마을을 찾은 탈북민 최소연씨가 알록달록한 벽화로 꾸며진 골목길을 걷고 있다. (RFA)

산비탈을 따라 집과 도로가 들어선 부산 감천문화마을과 달리, 청진에서는 경사진 땅에 집을 짓기보다 밭을 일궈 생계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청진은 이렇게 비탈진 곳에 집들이 별로 없어요. 이렇게 비탈진 면까지 도로를 만들고 집을 짓고 하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하죠. 오히려 이런 산비탈에는 밭 같은 것들이 많아요.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유지하는 땅이죠.”

소연씨는 감천문화마을의 골목 빨랫줄에서 고향의 정겨움을 발견하고, 산비탈과 도로에서는 고향과의 생활환경 차이를 읽어냈다. 같은 바다를 품은 도시라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에디터 이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