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최영윤
이번 시간에는 지난주에 이어 남한의 영화배우 최은희 씨와의 인터뷰를 전해드립니다 최은희 씨는 납북된 후 5년만에 남편 신상옥 감독과 극적인 재회를 한 뒤 북한에서의 본격적인 영화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영화계의 거장과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는 탈출하기까지 2년3개월 동안 17작품을 했을 정도로 초인적인 작품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납북돼 있는 동안에도 영화예술인으로서의 창작열을 발휘한 최은희씨를 만나봤습니다.
최은희 씨의 북한에서의 영화 인생은 전 남편이었던 신상옥 감독과의 기적적인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1978년 1월22일 납치된 채 북한 땅을 밟은 최은희 씨는 만 5년 동안 연금생활을 하며 지내던 중 1983년 3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최한 연회에 초대받아 간 자리에서 전 남편이었던 신상옥 감독과 재회합니다.
최은희 씨: 4,50명 백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있는 홀에서 연회하고 있는데, 저기 좀 보라고 하는 거예요. 날 끌고 가요. 가면서 보니까 신감독이 앞에 나타났잖아요. 놀랍고, 신기하고 한편 부부로서 몇십년 살던 사람인데 다시 만난 게 그 환경에서 얼마나 반가웠겠어요?
그때서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 영화 발전을 위해 두 사람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합니다.
극적인 재회를 계기로 최은희 씨와 신상옥 감독은 2년 3개월 동안 17개 작품을 제작할 만큼 초인적으로 영화 일에 전념합니다.
지난 1984년에 춘향전을 각색한 뮤지컬 영화 ‘사랑사랑 내사랑’은 북한 영화에 새바람을 일으킵니다.
최은희 씨: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총천연색 시네마 스코프 성춘향이라고 타이틀로 해서 찍은 거고, 북한에서는 춘향전인데 뮤지컬 춘향전이에요. 제목이 '사랑사랑내사랑'이에요. 우리 사랑사랑내사랑은 춘향의 판소리에서 나오는 가사거든요. 거기서 따서 제목을 붙인 거예요. r(기자: 그때 북쪽 주민들한테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면서요?) 어휴, 보통 인기가 아니에요. 3살4살 먹은 아이들도 그 사랑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요새말로 대박이죠 대박... 그래서 중국까지 다 영화가 상영됐고...
뮤지컬 영화 ‘사랑사랑 내사랑’은 상영 당시 영화 속에 나오는 주제곡을 서너살 어린 아이들까지 따라 부를 정도로 북한에서 큰 인기를 얻습니다.
최은희 씨: 노래는 판소리 노래가 아니고 현대음악으로 작곡을 했어요. 사랑사랑내사랑~ 전혀 다르죠. 가사만 있죠. (기자: 한번만 다시 해주시죠.) 사랑, 사랑 내사랑~ 그것 밖에 못하겠어요. 가사도 잊어버리고 상당히 유행했었거든요상당히 유행했어요, 갓 말 배운 애들이 '사랑사랑내사랑' 그러면서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요. 이북에서 뮤지컬 작품을 둘 했는데, 심청전.. 심청전도 뮤지컬 해서 그때 내가 심청이 어머니로 출연했어요.
최은희씨와 신상옥 감독의 영화는 북한 주민들이 제작해서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영화였습니다.
최은희 씨: 우리 회사는 남한에서도 신필름, 북한에서도 신필름으로 해서 제작을 했기 때문에 신필름 영화 하면 굉장히 좋아하고, 미리 신필름 영화 언제 나오냐고 문의가 들어오고 그럴 정도였거든요. 그래서 신필름의 신상옥, 최은희 하면 다 알았어요. (기자: 북측 주민들 가운데 최은희 선생님을 기억하는 주민들도 많겠네요? ) 최은희 씨: 네, 많지요. 그런데 여기처럼 자유롭게 주민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고 간혹 산책하러 나가도 사람이 따라나가니까 맘대로 접근해서 대화한다든가 하는 것은 드물었다. 허락받지 않으면 못만났어요.
1985년 최은희씨는 신상옥 감독과 함께 일제시대 만주 간도지방에서 유랑하던 우리 민족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여준 강경애의 소설 <소금>을 영화로 제작합니다.
이 영화에서 강인한 어머니의 역할을 맡아 열연한 최은희씨는 모스크바 영화제 출품 당시 시사회를 본 심사위원단과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까지 받고 여우주연상을 수상합니다.
최은희 씨: 운이 좋았다고 할까요? 북한 영화로 국제영화제 상을 .. 물론 한국에서도 아시아영화제에서 수상을 했지만 세계 영화제에서 탄 건 모스크바에서 처음이죠. 난 정말 생각지도 않게 그 여우주연상을 받고 기립박수를 받은 것이 평생에 처음이었거든요. 그 희열은 아마 잊어버리지 않을 거에요. 그때가 여배우로서는 최고의 기쁨이었고, 보람이었고.
최은희씨는 북쪽에서 생활하는 동안, 북한도 남한과 같은 한 조국임을 실감합니다.
최은희 씨: 정말 남과 북이 갈라져서 서로 다른 체제에서 오랫동안 지냈잖아요. 역시 사람들의 감정은 다 마찬가지다. 역시 동족간의 느낌이 무시할 수 없는 게 있다. 그래서 우리 작품이 나오면 금방 호응해주고, 또 같이 일하던 북쪽의 영화인들은 처음에는 어색하고 호흡이 맞지 않았지만은... 처음에는 조연출이고 배우고 잘 말을 안듣더라고요. 요구하면 말 안듣고 해서 한번 우리가 항의를 세게 했죠. 일 못한다고요. 사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옛날 배우들은 다 알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우리를 잘 모르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거기서도 좋은 작품 많이 만들었지만 처음에는 그랬다.
평생을 배우자로, 영화 동료로 살아온 최은의씨와 신상옥 감독이지만, 신 감독은 지난해 4월 이미 고인이 됐습니다. 최은희 씨는 요즘 신상옥 감독을 재조명하기 위한 기념사업회 발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최은희 씨: 신상옥 감독하면 우리나라에서 제작으로부터 기획, 감독 촬영 편집까지 혼자 다 몇가지 일을 해내시고 그러면서도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기시고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인데, 우리가 납북되고 미국에 사는 동안 공백기가 있었거든요. 남쪽에서는 북에 있었다고 우리를 배타적으로 보고 북에서는 또 도망갔다고 해서 우리를 배신자라고 그러고 우리는 남이고 북이고 우리 조국이고 민족이지만은 이 비극을 우리 두 사람만이 다 겪고 고뇌하고 고통받은 것 같아요. 그런 생각 하니까 감독님이 너무 안됐어요. 그래서 기념사업을 발족시키고 있다. 신감독에 대한 재조명해서 재평가해서 바로 잡아야겠다. 60년대 70년대 5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역사에요. 신상옥 감독이 영화계를 이끌어오다시피한 공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고 우리 작품이 100여작품이 고스란이 남아있는 것도 그런 거죠. 60년대 그 어려운 시기에도 한국영화를 발전시키고 기업화시키고 동남아시장에 진출시키고 국제영화제에 제일 먼저 출품한 사람도 신상옥 감독이고 그런 것 저런 것 모두 사장되다시피했기 때문에 아내이기 보다는 하나의 영화인으로서 의분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문제도 바로잡고 싶고.. 그래서 책 쓰게 된 하나의 이유가 됐어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영화배우 최은희 씨!
돌아보면 죽고 싶었을 때도, 슬플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인생이 행운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삶에 대한 시선이 따뜻합니다.
최은희 씨: 이걸 뭐 불행이다 하면 다 불행인 거고, 선택된 사람이었다고 하면 그럴 수 있고.. 우리가 이북에 갔다가 또 동구라파를 해서 지구 한바퀴를 돌면서 작품활동을 했었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선택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문제고 그런 건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할 수 있고, 이북에서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고..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 하느님이 선택해 주신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