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함께 함마숄트 광장에서 시위를 하고 한풀이 춤마당을 통해 이산가족들의 고통을 세계 인권단체에 알린다고 전했습니다.
서울통신 오늘은 이산가족들의 한을 춤사위로 풀어낼 탈북 무용수 김영순씨의 얘기를 전해드립니다.
평양종합예술대학 무용학 부를 졸업하고 조선 인민 협주단에서 20여 년 간 배우로 활동했던 김영순 씨는 김정일의 여인 이었던 성 혜림이 친구라는 사실을 발설 했다는 죄목으로 요덕 수용소로 잡혀갔습니다. 8년간의 악몽 같은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2003년 탈북해 남한에서 북한의 실상을 증언 하고 뮤지컬 요덕 수용소의 안무를 맡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틈틈이 공연을 하고 있는데요, 11월9일 일천만 이산가족 위원회 대표 미국 방문길에 동행해서 증언과 함께 한풀이 춤을 펼쳐 보일 것 이라고 밝혔습니다.
김영순씨는 유엔 함마숄트 광장과 워싱턴의 한국참전 용사비 참배 현장 그리고 워싱턴 광장 등지에서피켓 시위와 함께 한풀이춤을 추게 됩니다.
최승희 선생님이 저희들에게 살풀이춤을 가르쳐 주셨어요 살풀이춤은 수건도 들고 하고 그냥도 배워주었는데 여기 와서 음악은 같을 수 없지않아요. 그래서 여기 살풀이 음악에 맞추어서 최 승희 춤가락으로 추게 됩니다. 한을 푸는 춤이라 그거죠.
남한의 무형문화재인 살품이 춤을 본래 수건 춤 또는 즉흥 춤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춤사위가 섬세하고 고운 민속춤으로 가락이 슬퍼서 한풀이 춤으로 택했다고 김영순씨는 말 합니다. 그러니까 남한의 살풀이춤 가락에 최승희 춤사위로 녹여 낼 것이라고 합니다.
의상은 흰 치마저고리 인데 금박달린 저고리로 제가 의상을 만들었어요. 그것을 입습니다. 흰 수건을 들고 출까 말까 생각해요 안 들고 출까도 생각해요.
살풀이춤은 흰 치마저고리에 옷고름을 늘어뜨리고 흰 수건이나 천을 손 에 들고 맺고 어르고 푸는 3가지 기본동작을 중심으로 추는 춤입니다. 북한에서 최승희 제자였던 김영순씨는 최승희 선생으로 부터 배운 살풀이와 남한의 살풀이는 다른 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최승희 선생의 살풀이는 좀 어려워요 가락이 도는 것도 그렇고 좀 강해요 움직임이 그런데 남한에서 추는 살풀이는 80-90에도 출 수 있게 아주 온화하고 동작이 별로 없어요. 그게 차이점이 있어요. 그래서 음악이 아주 느리고 템포가 아주 느리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서 추지만 그래도 그 가락 템포 안 에서 내가 동작을 경쾌하게도 하고 도는 것도 넣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최 승희 선생이 배워준 가락을 많이 삽입해서 제가 춤니다.
뮤지컬인 음악극 요덕스토리의 안무를 맡았던 김영순 씨는 지난 2006년 미국 공연길이 미국의 서북부 시애틀에서도 가야금 산조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며 기뻐합니다.
북한에서 가야금 산조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월북한 조상선 선생이라며 북으로 간 남한의 많은 예술인들이 한때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사라지곤 했다고 전했습니다.
조상선 선생은 대한민국의 이름 있는 국악인입니다. 그분도 북에 와서 가야금 산조를 연주 했는데 정말 대단하죠. 그런데 그분도 복고주의, 복고주의라고 쇳소리 남도창을 반대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안기옥, 공기남, 조상선 선생도 다 자리를 떴어요.
특히 조상선 선생은 1935년에 조선성악연구회 직속, 창극 좌가 탄생하면서 창극 '춘향전'과 '심청전'이 서울 서대문 동양극장에서 공연 됐는데요, 이 때, 용왕 역을 맡았다고 합니다. 또 흥부전의 마당쇠 역할을 맡아 창극 운동에도 앞장을 서고 돋보이는 연기로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조상선 선생이 직접 창극단을 조직해서 조상선 편극의 사극 '선화공주'를 무대에 올렸을 때 박귀희 명창도 함께 출연을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렇게 창극분야에서 눈부신 활동을 했던 조상선 선생은 북한의 사상과 맞지 않는다는 창을 국악 예술인으로서 반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활동무대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것이라고 김영순씨는 전했습니다.
북에 가서 북한의 노래를 부르고 북한의 연주를 했으면 되는 거지 거기에 무슨 사상이 있어 가지고 예술가에게도 처벌이 가해지고 혁명화를 하고 예술무대에서 자리를 뜨게 하고 하는 것은 정말 북한제도가 아니고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월북한 세계의 무용가 최승희를 비롯한 많은 국악 예술인들은 북한에서 지시하는 목적을 위한 틀에 박힌 예술 활동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수용소는 물론 오지로 보내져 힘들게 살다 세상을 떠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고 김영순씨는 말합니다.
최승희를 비롯해서 예술계에서 강홍식 선생도 내 고향의 첫 연출가고 남한배우 전옥 선생의 남편이지 않아요. 그런 분들도 요덕 수용소에서 여생을 마친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파요. 안기옥 선생도 월북한 국악인 이예요. 안기옥 선생은 수용소는 아니지만 산골에 소개돼 간 것 같아요.
김영순 씨는 최승희 선생한테 발레도 배웠고 전통 춤도 배웠기 때문에 지금 남한에 와서 70이 넘었지만 이산가족들의 한을 풀어주는 춤도 추게 되었다며 최승희 선생의 우아한 동작을 그대로는 못한다고 해도 재현에서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즐겁다고 합니다.
김영순 씨는 남한에 와서 놀란 것은 예술인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활동을 하는 것 과 개인들의 무용학원을 만들어 후대를 양성하는 일 이라고 합니다.
80이 넘은 예술인들도 무용원을 만들고 하는 것을 보고 엄청 부러워요. 저도 돈이 있으면 무용원을 하겠는데 여의치 못해 그런 것을 못하니까 북한에서는 40넘으면 못해요. 예술계에서 다 물러나요 젊은 사람들만 할 수 있고 또 나가면 그다음 개별적으로 우리가 배워줄 수 없어요. 개인의 이름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회니까 오직 김일성 김정일 외 누가 자기 이름을 낼 수 있어요? 최승희도 국립무용극장이지 최승희 무용연구소는 해방 이후에 잠깐 반짝하고 있었지 종전 후는 다 국립무용극장으로 개칭이 됐어요.
김영순씨는 영등포에서 우연히 함기봉 무용연구원을 보고 너무 반갑고 놀라웠다고 하는데요, 월북한 함기봉 선생이 북한에서 바로 자신의 담임선생 이었다고 회고합니다.
함기봉 제자 아무개 무용원, 함기봉 선생이 저희 선생이었어요. 월북한 무용가예요. 우리 담임선생이었어요.
북한에서 춤 광신자였다는 김영순씨는 젊은 시절, 1946년에 김구, 김규식이 민족 통일 정부 수립 때문에 남북 협상을 위하여 입북 했을 때도 춤을 춘 기억이 뜨겁게 남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규식, 김구, 김일성 앞에서 장백산 줄기줄기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었어요. 그런 것을 생각할 때 너무 속이 상해요 늙어서....
하지만 지금도 자신의 춤이 도움이 된다면 언제 어느 곳 이든 건강이 다하는 날 까지 춤사위를 아낌없이 불사르고 싶다는 열정을 보입니다.
남한의 일천만 이산가족 대표 유엔 방문에서 이산가족들을 위로하는 한풀이 춤을 준비하고 있는 탈북 무용수 김 영순 씨의 얘기 들어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