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 외면 속 죽어가는 해외 북 노동자들

워싱턴 - 자민 앤더슨, 서울 - 김지은 andersonj@rfa.org
2023.09.20
당국 외면 속 죽어가는 해외 북 노동자들 RFA가 최근 입수한 러시아 파견 북한 건설회사의 내부 문건. 코로나19 대유행 기간 동안 병에 걸린 노동자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폐쇄된 국경 탓에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사실상 러시아에 방치된 것으로 드러났다..
/ RFA PHOTO, 그래픽-김태이

앵커: 외화벌이를 위해 해외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RFA 자유아시아방송이 최근 입수한, 러시아 파견 북한 건설회사의 내부 문건에 따르면 전체 노동자 54명 중 8명이 말기암 등 중병으로 노동력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기는 커녕 사실상 방치됐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자민 앤더슨 기자가 보도합니다.

  

암이면 어떻다는건가. 치료할 돈이 있으면 집에 보내겠다.’

 

20145월 러시아 극동 하바롭스크에 외화벌이를 위해 파견돼 일하던 한 40대 북한 건설 노동자.

 

7년 만인20215월 림파암(림프종)이 발견돼 종양전문병원 치료를 권고받자 치료비가 없다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치료 대신 일을 나갔던 이 북한 노동자는 급기야 식사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로 이 약, 저 약 많은 약을 썼지만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RFA가 최근 입수한, 러시아 내 한 북한 건설업체의 내부 문건에는 이 환자 외에도 다수가 암 등 중병에 걸렸지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상황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북한에서 의사로 근무했던 최정훈 고려대 공공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 문건을 검토한 뒤 병명 등 북한식 철자법(-, 림파암-림프종)과 띄어쓰기 방식으로 북한 주민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확인했습니다.

 

로련(러시아 연방) 하바롭스크주재 제1건설회사 환자 실태제목의 이 3쪽짜리 문건은20222월께 작성됐습니다.

 

문건은 회사에 소속된 인원 58명 중 관리자 겸 감시원(일군 3, 통역1) 4명을 제외한 54명이 노동자라며 이 중 8명이 주재국 보건기관의 의학감정으로 노동능력을 상실한 상태라고 밝혔습니다.

 

구체적으로 위암, 림파암(림프종), 간경변, 폐기종, 추간판 환자가 각 1명씩이었고, 심장병 환자가 2, 그리고 1년 이상된 진단불확정 환자가 1명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이어 위암 4기 진단을 받은 한 노동자의 현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언급했습니다.

 

전직 대외건설국 산하 평양대외건설자양성사업소 노동자 출신의 이 50대 남성은 2015년 러시아에 파견돼 2021년 위암 4(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듯 ‘현재까지 회사에서 자체로 면역치료를 하였다고 언급됐습니다.

 

그러면서 ‘환자에게서 기본은 생활안정과 식사요법치료인데 환자 자신이 계속 쓸데없이 신경을 쓰다보니 병상태는 계속 악화되어 현재는 식사도 하지 못하고 진통을 받는 상태라고 책임을 환자에게 떠넘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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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종 환자에게 책정된 수술 비용은 32만 루블, 미화로 약 3315달러. 노동자들은 지불할 돈이 없다며 병원 치료를 거절하고 있다. / RFA Photo, 그래픽-김태이 

문건에는 이 밖에 폐기종 진단을 받은 뒤 치료시기를 놓친 50대 남성 근로자의 사례도 언급됐습니다.

 

대외건설국 소속 류경대외건설자양성사업소 노동자 출신의 이 남성은 20201월 러시아에 파견된 뒤 8개월 만에 숨차기, 미열나기, 입맛없음 등 병 증상이 나타났고 2021년 봄 폐기종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이 애초 3.5센티미터 크기였던 폐기종은 1년 만인 202215센티미터로 커졌고 수술비용만 32만 루블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문건에는 이처럼 북한 당국이 외화벌이를 위해 노동자들을 해외로 보내 고된 노동에 동원하면서 그들의 기본적인 인권인 건강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있는 점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특히 문건이 작성된 시점인 2022년 초에는 러시아에 파견돼 있던 북한 노동자들이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던 시기였다고 하바롭스크의 한 현지인 소식통(신변안전을 위해 익명 요청)은 전했습니다.

 

이 소식통은 RFA코로나19 대유행 전에는 중병 진단을 받고 일을 할 수 없는 환자들은 한달 내로 북한에 돌려보냈지만, 코로나 기간 동안에는 (국경봉쇄로) 교통편이 막혀 있어서 불가능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북한 노동자들의 생활을 직접 살펴보고 온 강동완 동아대 북한학 교수는 당국의 외면에 일부 격앙된 반응도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강동완 교수: 코로나19 시기에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고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이 코로나19 대응을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지시를 했고, 치료나 백신에 관한 부분을 전혀 지원하지 않았던 거죠. 결국은 믿고 있었던 조국이 우리를 버렸다라는 인식들이 굉장히 많았고, 해외 노동자들이 동요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강 교수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야간 노동을 포함해 하루 16시간 이상 작업을 하는 고된 건설 노동에 투입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분 문제와 치료비 문제로 병원에 갈 수 없어 생니를 스스로 뽑은 노동자도 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라고 말했습니다.

 

RFA가 입수한 문건에도 치료불가능이라고 하여 현재까지 회사에서 자체로 면역치료를 하였다”, 환자가 직접 조선족 의사를 찾아가 만났다와 같은 내용들이 확인됩니다.

 

북한에서 의사로 근무했던 최정훈 고려대 공공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RFA특히 중병에 걸린 환자들은 적절한 치료 없이 남겨져 병을 악화시키고만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더러 의사가 노동자들과 함께 파견되기도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것이고, 감기나 소화 불량 정도의 질환이 아닌 중병 치료나 수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최정훈 연구원: (문건에 기록된 위암 4기 환자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살아있기는 좀 곤란하죠. 위암 4기였으면 아무리 생명 연장을 해도 6개월, 1년 정도. 먹지를 못하니까 영양실조에 걸려서 오래 못 살아요. 약도 변변찮고, 약이 있더라도 간부들 먼저고 노동자들은 돈 벌어서 알아서 사 먹어라하고 방치하고요.

 

월급에서 당국에 바치는 자금과 각종 운영비, 지원비 등을 제하면 노동자들의 수중에 남는 돈은 약 10~20%, 미화로는 한 달에 겨우 100달러 수준인 북한 노동자들이 5~6천 달러 이상의 현지 병원비를 지불할 여력은 없습니다.

 

여기다 장기 체류하는 경우가 많은 러시아 파견 북한 노동자들의 경우 건강검진을 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강동완 교수: 보통 한 번 오면 4년 정도의 비자를 받아서 나오는 데, 비자를 연장해 8년 정도까지 있습니다. 의료비, 치료비 문제 때문에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못 받습니다. 그러다 보니 암이 발생할 경우에는 거의 말기가 되어서야 발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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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짜리 문건의 맨 마지막 장. 현지 북한 건설업체가 환자들 치료 비용으로 인한 자금지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 RFA Photo, 그래픽-김태이 

이처럼 북한 당국의 외면 속에 중환자가 늘자 회사 측은 문건 맨 마지막에 ‘질병환자들이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하여 현재 자금지출이 제일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이어 ‘회사 의견이라며 수십만 루블에 이르는 치료비용을 지출해야 할 상황이어서 올 해 1월부터 국가계획수행이 지장을 받게 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회사에서는 올해 1월부터 조국과 전혀 련계(연계)를 가지지 못한 조건에서 조국의 결론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북한 당국의 관심을 읍소했습니다.

 

북한 노동자들이 중병 탓에 잇따라 노동력을 상실하고 있지만 평양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 현지 북한 건설업체가 본국에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취지에서 문건이 작성됐음을 짐작케 합니다.

 

201712월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2397호는 유엔 회원국이 북한 노동자를 201912월까지 본국으로 송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러시아 극동지역에만 수천 명의 북한 노동자가 여전히 외화벌이에 내몰린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기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최근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이 농업∙건설 부문에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해 북한 노동자의 러시아 파견 확대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습니다.

  

에디터 박정우,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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