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터뷰] 북송 ‘4번’, 탈북 ‘6번’ 최민경 “북인권 ‘산 증인’ 역할하고파”
2024.01.24
앵커: 지난해 10월 중국이 아시안게임이 종료된 직후 대규모의 탈북민들을 강제북송했습니다. 코로나가 잠잠해진 이후 이뤄진 북송 사례 가운데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알려졌는데요. 4차례의 강제북송과 6차례의 탈북 끝에 지난 2012년 한국에 정착한 최민경 NK감금피해가족회 대표에게는 이 사태가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최 대표는 NK감금피해가족회의 활동을 본격화했는데요. 조만간 유엔 무대에서 탈북민 강제북송 문제의 심각성을 알릴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목용재 기자가 최민경 NK감금피해자가족회 대표를 만났습니다.
[기자] 먼저 NK감금피해자가족회 단체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최민경] 지난해 10월 강제북송이 이뤄졌습니다. 중국이 아시안게임 (이후) 북송했습니다. 이번에 강제북송이 논란이 되면서 NK감금피해자가족회를 정식 법인으로 지난해 10월 등록해 출범했습니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교화소 등에서 거의 100명 중에 80명은 죽습니다. (정치범)수용소는 죽어야 나오는 곳이고요. (그래서 단체 구성원은) 거의 교화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고 고문 피해 당사자들입니다. 그리고 제3국 출생자들을 비롯해서 그 가족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자] 강제북송 경험자로서 지난해 10월 벌어진 대규모 강제 북송 사건, 남일 같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최민경]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단체를 출범한 계기도 됐고요. 우리는 정말 ‘산 증인’들이잖아요. 북송 피해자 가족들은 어떻게 살겠어요. 또 다시 나온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북중) 국경은 거의 막혔다고 보면 됩니다. 김 씨 독재 정권은 지금 (탈북) 처벌 수위를 높여서 21세기에 감옥을 늘리고 그 안에서 고문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나치보다도 더 하다고 생각해요. 대한민국 정부도 이제 과감히 산 증인인 우리를 통해서 목소리도 높여서 강제북송만은 막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10월 강제북송 피해자들, 재탈북 의지 상실했을 것”
[기자] 지난 10월 대규모 강제북송 피해자, 혹은 그 가족들의 상황에 대해 파악하신 바가 있으신가요?
[최민경] (강제북송 피해자 부모가) 한국 외교부에 발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내 아들을 구해 주세요, 내 아들을 구해주세요, 이랬는데 (그 아들이 북한으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지금 약간씩 들려오는 정보로는 (북송된) 600명이 모두 교화소에 보내졌다고 합니다. 한국행을 한 사람들의 경우 따로 구분하는데요. 중국 정부가 한국행이라고 도장을 따로 찍어서 보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정치범수용소행이에요. 죽어야 나오는 곳. 우리 때는 그나마 국경이 느슨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지난해 10월 북송된) 사람들은 저 때보다도 더 굉장히 힘들 것으로 생각해요. 이 사람들은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진이 빠질 대로 다 빠졌을 겁니다. 문제는 국경이에요. 다시 건너올 수 있다는 희망이 없는 겁니다. 중국도 어마어마한 장비를 투입해서 감시 카메라를 곳곳에 설치하고 국경 연선에 탐조등 같은 것도 설치하고, 밟으면 사이렌이 울리는, 그럴 정도로 보완을 했다 합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탈북) 엄두를 못 내는 거예요.
[기자] 대표님도 네 차례에 걸쳐 강제북송을 당하신 피해자입니다. 어떤 인권 침해를 당하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최민경] 임산부를 강제북송 시킵니다. 무조건이에요. 북한 보위부는 “너희는 외국에서 중국 종자를 베어왔다”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냥 구두발로 (배를 밟습니다.) 저는 이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임산부는 그냥 구두 발로 차이고 머리채를 잡히고 강제낙태를 당합니다. 그리고 (수감자에 대한) 치료라는 게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거죠. 그런 상태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거기서 죽는 겁니다. 어떻게 삽니까. 중국 종자를 임신했다고 그렇게 잔인하게 폭행을 하고 구두 발로 차서 낙태를 시키는 거죠. 그렇게 고문을 합니다.
제 첫 번째 북송은 2000년, 그 다음 두 번째는 2002년도였습니다. 아이가 있기 때문에, 그 아이 때문에 (중국으로 다시) 가야 하잖아요. 정말 미치겠는 거예요. 죽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주변에서) 바보처럼 왜 그(살던) 집에 다시 가냐고 했어요. 당시 중국 정부는 (북송) 초창기 탈북민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줬습니다. 그 다음에 공안에 신고하면 1000 위안, 변방대에 신고하면 5000 위안을 줬다고 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시댁 쪽 사람이 (사업) 부도가 나니까 나와 (탈북민) 동서 둘 다 신고했습니다. 얼마나 잔인해요. 저는 아이가 이미 있었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 아이가 불쌍하잖아요. 그러니 거기로 (다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댁 쪽 사람이 그랬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 때문에 정말 그렇게 됐던 겁니다.
“‘전거리 여성교화소’, 수감자들이 직접 건설…통나무 깔린 사망자 많아”
[기자] 마지막으로 북송됐던 2008년에는 북한 정치범수용소보다 악명 높은 전거리교화소에 수감됐셨다고요.
[최민경] 전거리교화소는 일제가 만들어놓은 수용소예요. 지형적으로 유리합니다. 사방이 산으로 꽉 둘러 막혀 있어요. 도주를 해도 돌고 돌아서 떨어지게 되는 그런 위치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김일성이 남자 교화소로 썼던 곳입니다. (또) 거기에 만들어 놓은 것이 탄광입니다. 목재 관련 일도 하고요. 논밭은 없습니다. 어쨌든 남자 교화소는 강제 노동, 탄광 (노동)이 유명하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죽은 사람이 엄청 많아요. 건물도 낡았고.
(2008년에) 저를 포함해서 (중국 같은 지역의) 시골에서 34명(의 탈북민들)이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전거리교화소를 갔습니다. 가니까 남자 교화소인거에요. 60평짜리 한 개 병동을 내서 거기에 (여자 수감자들을) 쓸어 넣었습니다. 300명이나. 지그제그로 눕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사람 냄새가 말도 못 하죠. 돈만 있으면 그래도 친인척들이 힘을 써서 구출도 하고 도주도 하고 그랬는데, (그 당시) 처벌 수위가 높아져서 수감자들을 쓸어 넣으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 안에서 강제 노동으로 우리가 (여자 교화소를 새로) 지었어요. 남자 그 교화소 옆에 여자 교화소가 생겨난 거예요.
(건물을) 지어야 하니까, 죄인들이 동원되는 겁니다. 무슨 기계, 장비라는 게 없어요. 그래도 먹이기는 하더군요. 그런데 짐승도 그런 거를 안 먹습니다. 강냉이 껍데기, 단지 밥이라고 우리가 보통 그렇게 말하는데 모래까지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소금국이 있고 양배추 절임이라고 있습니다. 염장을 해야 하는데, 죄인들이 신발을 신은 채로 삽으로 작업을 해요. 그런데 소금이 없으니까 밑에서부터 그게 썩는 겁니다. 말이 염장이지, 새카맣게 돼서 우리끼리 ‘까마귀 날개’라고 불렀습니다.
(전거리 여자) 교화소를 우리가 자체로 지으면서 통나무에 깔려 죽은 사람이 엄청 많았습니다. 먹지 못해 죽고, 맥없이 죽는 거예요. 그리고 나무를 피하지 못해서 죽습니다. (나무가) 내려간다고 들으면 그걸 피하지 못해요. 비키라고 말은 하죠. 그런데 힘이 없으니 피하지 못하면…, 거기서 시체가 말도 못 합니다. 피가 막 눈밭에 날립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태우는 데, 이곳을 ‘불망산’이라고 해요. 열병이 돌았을 때는 한 주에 (시신을 실은) 차가 한 대씩 나갔습니다.
저도 (열병에) 걸렸고 (중국 같은 지역에서 붙잡힌) 34명이 (전거리교화소에서) 대부분 죽었습니다. 2010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명으로 발표가 나면서 대사면이 내려졌습니다. 그때 그걸 적용을 받아서 저는 2년 3개월 수감 이후 석방됐습니다. 그 때 당시 34명 중에 6명이 살아나왔어요. 그 중 4명은 한국에서 재회했고 2명은 아직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중국의 탈북민 강제북송, 어떤 해결 방안이 있다고 보십니까?
[최민경] (북한 당국이) 강제낙태를 시키는 것을 중국 정부에 따져줬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뱃속의 아이는) 중국 사람이잖습니까. 그리고 한국 정부가 못하는 부분은 우리가 ‘산 증인’이니까 우리 민간단체를 통해서 증언을 하게끔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고문, 후유증 등) 의학적 서류를 우리가 가지고 가서 고발을 할 거니까 적극 힘써 달라고 했어요. 한국 정부가 못하는 말을 우리 ‘산 증인’들이 하겠다니까 (한국 정부 측이)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3국 출생자들에 대한 것에 대해서도, 이들은 정체성에 혼란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지?”라는 거죠. 아이들이 엄마가 북송당하고 고문당한 것을 봐서 굉장히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복지 시스템으로 마음 치유, 상담 같은 것도 하는 등 이 부분에 대해 정부에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유엔에서도 피해자들의 증언이 굉장한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조만간 유엔에 가서 강력하게 (피해 증언을) 제가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금 (중국에) 남겨져 있는 사람들이라도 한국 정부가 데려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잖습니까. (중국이 탈북민을) 난민으로 인정하든지, 그것이 안 된다면 태국같은 제3국에 추방이라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중국 정부에 3국에라도 추방해 달라는 것을, 그런 것을 요구할 방법을 우리가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최민경 NK감금피해자가족회 대표였습니다. 서울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목용재입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