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 총상을 당했지만 살았다 미군 병사 잭 체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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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1950년 11월 27일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서 미국 해병대 1만 여 명과 중공군 12만 여 명 사이에 벌어진 장진호 전투,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었던 잭 체프만씨는 미국으로 돌아와 10개도 넘는 훈장을 받았지만 57년이 지난 지금도 체프만씨는 한국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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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kissena park(키세나 공원)있는 경험의 고뇌(the auguish of experience)- RFA PHOTO/이진서

Jack Chapman: 나는 7번이나 총상을 입었습니다. 머리와 양팔 그리고 두 다리 엉덩이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미 해병과 영국 해병이 저를 19일이나 업어서 가거나, 부축을 해서 첫 번째 포로수용소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의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몇 명과는 연락을 하고 지내는데 전우애가 저를 살렸습니다. 악몽을 아직도 꾸고 있고 지금도 우리가 있었던 곳, 전투가 선하게 그려집니다.

17살의 꽃다운 청년 체프만, 한국전에 참전한 체프만씨의 부대는 인천상륙 작전으로 미 해병 제1사단과 함께 함경남도 장진호 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갑니다. 그리고 맞닥뜨린 중공군. 체프만씨가 기억하는 장진호 전투는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Jack Chapman: 나는 장진호 전투가 아마도 노르망디 전투와 같거나 더 참혹했던 전투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기온 때문인데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는 혹독한 추위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대략 10배나 많은 중공군과 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장진호에서 우린 많은 전우를 잃었습니다. 우리는 추위에 싸울만한 장비를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추위를 견딜만한 옷도 없었습니다. 혹독한 추위는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많은 육군과 해병이 동상으로 다리를 잃었습니다. 한 병사는 군화를 벗었는데 발톱이 그냥 묻어 나왔습니다.

당시 사단장이었던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마침내 미 해병을 함흥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합니다. 미 해병과 육군은 장진호를 빠져나와 함흥으로 이동하면서 중공군 제 9병단 10개 사단 가운데 7개 사단을 격파하는 맹활약을 펼칩니다. 미 해병의 함흥으로의 진주는 10여만 민간인들을 이남으로 피난하게 하는 길을 틉니다.

17살에 낯선 타국 땅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몸을 받쳐야 했던 체프만씨는 이제 74살이 됐습니다. 두 딸과 아내 그리고 손자 손녀들은 상의 용사인 체프만씨를 자랑스러워합니다. 체프만씨는 그러나 괴롭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전우들이 꽁꽁 얼어붙은 북한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북한 당국은 그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Jack Chapman: 아직까지도 8천여 명이 넘는 해병, 육군, 공군의 참전용사들이 한국전중 실종이 돼서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그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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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현: 해병대가 상륙을 한다고 해병대는 8군을 통해서 영어하는 장교를 보내달라고 하니까 없었거든요. ...너 영어하냐? 그렇다고 하니까 중위다 해서 미 해병대에 배속이 된거죠.

21살 때 연락장교로 미군들과 함께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한국 육군의 이종현씨는 장진호 전투에서 사람의 정신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종현: 전투할 때 밤에 총을 쏘면 불이 나니까 거기다 집중 사격을 합니다. 여기서 많이 총을 쏜 사람은 사격의 대상이 되니까 숨어 있으려고 하는데 소대장이 나와서 너희가 해병이냐? 해병의 정신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고 할 만큼 해병대 정신이 막강했습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은 결코 동료를 적지에 두고 혼자 살아나가지 않는다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이종현씨는 회고합니다.

이종현: 해병대는 죽은 사람들과 부상당한 사람을 꼭 데리고 나갑니다. 지연이 되지만 꼭 시신과 부상당한 사람하고 후퇴할 때 같이 나가는 것이죠. 사기의 문제죠. 내가 부상을 나의 전우가 날 데리고 간다는 것이 사기에 아주 중요합니다.

북한은 장진호반 전투를 북한군이 대 승리를 거둔 전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장진호반 주위에는 그때의 자취가 남아있다며 중학교 교과서, 학생교육자료집, 군인교약자료 등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과 연합군에 대항한 주력군대는 북한군이 아닙니다. 당시 중공군이고 중국은 북한을 위기에서 구해준 전투로 스스로 대견하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잭 체프만씨는 전쟁 발발 반세기가 지났지만 마지막 한명의 병사까지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 올 때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자신과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렸지만 아직도 자유가 억압당하고 인권이 유린되는 북한의 현실을 생각하면 체프만씨의 아픔은 더욱 사무쳐옵니다.

Jack Chapman: 김일성 당신은 내 생각에는 완전히 잘못 판단한 겁니다. 당신은 모든 자원을 군사력에 투입하기보다 북한 주민들을 위해 사용했어야합니다.

내일은 체프만씨가 그토록 원하는 미군의 유해발굴 사업을 중심으로 장진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지난 57년을 되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