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독재시대 연 ‘8월 종파사건’ 54돌

서울-노재완 nohjw@rfa.org
2010-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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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8월 30일은 54년 전 김일성의 최대 정치적 위기의 사건으로 알려진 ‘8월종파사건’의 시발이 됐던 날입니다.

김일성은 이 사건을 계기로 최창익, 윤공흠 등 연안파는 물론, 박창옥 등 소련파까지 모두 제거하면서 일인독재체제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서울에서 노재완 기자가 보도합니다.

“지난 기간 윤공흠처럼 우리 당을 막스 레닌주의 당이 아니라고 하면서 당의 권위와 위신을 훼손시키고 당을 분열,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최창익의 종파주의적 행위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8월종파사건’이 일어난 지 약 3개월 뒤인 1956년 11월 25일 당원강습회에서 당시 김일성 수상이 행한 연설의 한 대목입니다.

‘8월종파사건’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북한 스스로 붙인 이름입니다.

해마다 이 시기가 되면 북한에서는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텔레비전 등을 통해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주민들에게 방영합니다.

탈북자 최인철 씨의 말입니다.

탈북자:
북한에서는 8월종파사건을 담은 영화가 참 많은데요. 그 중 대표적인 영화가 <전환의 해>입니다. 이 영화는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들이 중공업 우선정책을 하려는 당에 도전하고 김일성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음모를 저질렀지만, 결국 당이 이를 짓부수고 이겨냈다는 내용인데요..

이 사건의 발단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던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는 공산권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면서 스탈린의 지도노선에 충실했던 북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당시 권력핵심에서 소외돼 있던 부수상 최창익을 비롯한 연안파와 부수상 박창옥 등 소련파 세력들이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김일성 지도부의 독주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력을 규합해 김일성 지도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섭니다.

때마침 김일성은 10여명의 각료급 인사를 대동하고, 56년 6월 1일부터 약 50일간 소련과 동유럽 순방 길에 오릅니다.

전후 복구 이후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외부원조가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를 틈타 연안파와 소련파는 결국 8월 30일로 예정됐던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축출하기로 결의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미리 간파한 김일성의 추종세력들이 동구라파 순방중인 김일성에게 보고했고, 다급해진 김일성은 서둘러 평양으로 돌아옵니다.

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김일성 세력은 즉각 군대를 동원했고, 사태는 역전돼 도리어 반대세력을 축출하기 시작합니다.

북한전략센터 김광인 소장의 얘깁니다.

김광인: 북한에서 가장 큰 권력투쟁으로 알려진 8월종파사건은 김일성 개인에게는 정치적으로 가장 큰 위기였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반대세력을 축출하고 나아가 김일성 일인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결국 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윤공흠, 서휘, 이필규 등 연안파 인물들은 중국으로 피신했고, 당에서는 이들을 모두 출당, 철직처분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2년에 걸쳐 국가반란음모라는 죄목으로 관련 인물들이 모두 숙청되면서 김일성 세력에 반기를 들던 연안파와 소련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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