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국군포로 박주홍 씨가 향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로써 한국으로 귀환한 국군포로 생존자는 12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서울에서 한도형 기자가 보도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으로 끌려가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탈북한 국군포로 박주홍 씨가 지난 26일 93세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박 씨는 정전협정을 불과 한 달 앞둔 1953년 6월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싸우다 북한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박 씨는 이후 47년간 함경남도 단천탄광에서 강제노역으로 고초를 겪다가 일흔을 넘긴 2001년 탈북해 이후 22년간 한국에서 생활했습니다.
국군포로 소송 등을 지원해온 한국 내 북한인권단체 물망초의 박선영 이사장은 27일 자유아시아방송(RFA)에 생전 박 씨가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게 되도록 보탠 것이 없어 미안하다’고 말했던 일화를 설명하며 박 씨가 “굉장히 부드러운 분”이었고 “존경스러운 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박 이사장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지난 6.25 때와 오늘(27일)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국군포로 생존자들을 만날 것을 요청했지만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공무원들이 타성에 젖어 국군포로에 대한 인식이 잘 바뀌지 않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면서 박 이사장은 “국가에서 국군포로 생존자에게 훈장을, 이미 돌아가신 국군포로에게는 추서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고 “이들이 북한에서 어떻게 포로생활을 했는지 관련 자료를 전쟁기념관, 역사박물관 등에 전시해 국군포로의 존재를 널리 알려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그 인품과 생각의 깊이, 또 사고하는 어떤 방식이랄지 이런 것이 너무 존경스러운 분이셨습니다. 어르신들이 어떻게 북한에서 포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를 전쟁기념관이나 역사박물관에 상설 전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이 잘 모르거든요. 국군포로라는 존재 자체도 모르고 그분들이 북한에서 어떻게 사셨는지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한편 3성 장군 출신인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은 정전협정 70주년을 하루 앞둔 26일 국군포로 유영복, 김성태 씨를 의원실로 초청해 위문했습니다.
신 의원은 이 자리에서 “역대 정부가 그동안 (국군포로 문제와 관련) 잘못한 것이 맞다”며 “자세히 살피고 바로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챙기겠다”고 밝혔습니다.
신 의원은 지난 6월에는 국군포로 및 가족이 북한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경우 국가가 손해배상금을 대위변제하도록 하는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습니다.
대위변제란 본래 북한이 내야 하는 배상금을 정부가 피해자 측에 먼저 지급하고 추후 정부가 북한에 이를 청구하는 방식으로 현재 국군포로들은 북한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문협 추심금 소송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받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1994년 고 조창호 중위의 귀환을 시작으로 자력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는 80명인데 이번 박 씨의 별세로 귀환 국군포로 생존자는 12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앞서 지난 2월에는 북한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탈북한 국군포로 한재복 씨가 별세한 바 있습니다.
국정원이 2007년 탈북민 진술 등을 토대로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기준 북한 내 국군포로는 1770명이며 이중 생존자는 560명이었습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지난 2014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북한 당국이 최소 5만 명의 한국군 포로들을 돌려보내지 않았고 약 500명이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산한 바 있습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