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진서
한국전쟁이 있는지 57년 매일처럼 지척에 있는 고향땅을 바라보고 살지만 가볼 수가 없습니다. 북한 해주와 30분 거리인 남한 연평도에 살고 있는 박두영씨는 지금도 고향생각이 날때면 친구들과 소주한잔을 마시며 통일의 그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올해 75상의 박두영씨를 연평도에서 만났습니다.

바로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고향이 보이잖아요
보이지
1시간이면 갈 수 있는데 57년동안 못가고 있잖아요
한시간도 안가요. 30분이면 가요. 뭐 누구 탓을 하겠어요. 나라탓을 하겠어요. 저기 가면 빨갱이 인데...다 빨갱이 보기 싫어서 여기 왔는데.
약주도 하십니까?
하죠
일도 안풀리고, 약주도 한잔하면 답답한 마음에 갑자기 고향이 그립고 가고싶다는 충동도 있을 것 같은데요

충동은 없는데 네 맘에 언제나 갈까 어머니 아버지도 다 죽었지만 ..살았다고 보기 힘들죠 다 100상이 넘었는데...그러니 그 생각을 하면 한이 없잖아요. 친구보고 소주 한잔하자 하면서 먹고 그것으로 해소 되고 마는거지... 김정일을 원망하겠어, 우리 정부를 원망하겠어. 한잔하고 해소 되면 자고 일어나면 또 일하고 ...
섬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내가 철공소를 했습니다. 우리가 피난 나왔을 때는 엔진 이라면 덴마크다 뭐다 우리것은 없었어요. 옛날에는 야끼다마라고 해서 그것 있을 때는 일이 많아서 밥 벌어 먹기가 쉬웠어요. 산소용접, 전기용접도 하고 해서 그때는 밥벌이가 됐는데 ...그게 한 10년 전까지였는데 그 다음에는 기술이 없어서 그냥 있지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까
자녀는 몇 분이나 두셨나요?
여기 와서 장가가서 아들 3형제 딸 하나 뒀어요
북한도 사람 사는 땅이고 한데 굶어 죽고 한다는 소릴 들으면 고향이라 생각이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여기서 쌀 주고 하는 것은 정부 시책이니까 잘 모르고 거기 막내 동생이 있고 조카가 있어요. 다섯 식구 두고 일곱 식구가 나왔는데 궁금하죠. 여기서 금강산도 가고 하는데 생각 많이 하지 통일 되면 물론 가겠지만 ...
선생님은 18살에 와서 한번도 섬을 안떠났나요.
안떠났어요. 여기가 미수복지로 돼있다가 수복지로 돼서 영장이 나왔어요. 18살에 피난 나와서 26살에 영장을 받았어요. 그대 진해 해병대로 갔지 훈련 3개월 받고 고향이 연평도라 하니까 이리로 보내준겁니다. 여기서 결혼도 하고 하니까 여기 주저 앉은거죠. 그대 군인 월급이 술한잔 값이야.
그렇게 월급이 적었으면 어떻게 생활은 했나요
여자들이 물동이 이고 나가 물장사 하고 조기 말려서 팔고 그렇게 먹고 살았지...
군대 얘기를 잠깐 하자면 북에 있으면 인민군이잖아요. 남쪽에서 귀신잡는 해병으로 북쪽을 바라보면서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상황에서 갈등은 없으셨나요?
갈등은 있었지만 총을 쏠수는 없었잖아요. 어디 인민군하고 마주해야 총을 쏘지
해병대이셨는데 서해교전으로 외부 사람들이 연평도를 기억하고 있는데 그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산에 가서 봤는데 가서 싸우고픈 심정이었죠. 그냥 산에 올라가서 보고 잘한다 쏴라 그정도지.
밤에 자는데 갑자기 또 쳐들어오지나 않나 하는 불안감은 없으세요.
전혀없어. 나도 해병대 근무를 했지만 철저히 경계를 서니까...
너무 시간이 흘러서가 무뎌진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해군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편안하신겁니까?
그렇지 우린 국방이 이만큼 튼튼하다. 철저하게 지키고 있으니까...그리니까 믿는거지
살다보면 힘든적도 있지만 행복하고 기억에 남는 흐믓한 순간도 있는데...
아이들은 모르지만 내가 행복한 것은 철공소 할 때는 행복했죠. 마을 사람들이 뭘해도 우리집에 오는겁니다. 박사라고 하면서 다 찾아오고 그대는 행복했죠. 그때는 또 한참 젊었고.
고향 땅을 지척에 두고 바라보면서 반평생을 사셨는데 통일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도 그걸 모르지만...통일이 됐으면 얼마나 좋겠나...죽기전에 될는지 나도 이제 75살인데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심정이야 말할 것 없고 ...한가지 기대는 내가 죽기전에 통일이 돼서 들어가야 아이들에게 말을 해주잖아. 피난 나와서 태어난 아이들은 누가 누군지 모르잖아. 죽기전에 통일이 되겠는지 그게 한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