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수천 명의 국군포로가 북한에서 소련으로 끌려갔으며, 정전 후에도 송환되지 않은 사실이 미국 국방부 비밀해제 문서를 통해 12일 밝혀졌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미.러 전쟁 포로.실종자 공동위원회’가 지난 1993년 작성한 ‘한국전쟁 포로들의 소련이동 보고서’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미.러 전쟁 포로.실종자 고동위원회는, 미국과 러시아가 냉전이 종식된 후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포로의 러시아 생존여부 확인과 유해 반환을 위해 만든 조직입니다.
‘한국전쟁 포로들의 소련이동 보고서’는 강상호 전 북한 내무성 부상과 1953년 국군포로 러시아 이동 문제를 심층 보도한 미국 월간잡지 에스콰이어(Esquire)의 자이그먼트 나고스키 기자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남한 언론을 통해 공개된 이번 보고서에 따르면, 국군포로 등의 소련 압송은 지난 51년 11월부터 52년 4월까지 기차와 해상을 통한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당시 수 천 명의 국군 포로들이 소련 내 300-400개 수용소로 이송됐으며, 수용소는 타이가 지역이나 일부는 중앙아시아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강상호 씨는 특히 한국군 포로들의 수용소 이송을 지원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국군과 남한 정치인들로 이뤄진 일부 포로들은 오호츠크 등 소련 극동 항구로 이송돼 콜리마 수용소 등 포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또한, 최고 만 2천명의 포로들이 추크치해 지역으로 이송됐습니다. 추크치해 지역으로 이송된 포로들은 도로공사와 비행장 건설 등에 동원돼 사망하는 비율이 높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보고서는 러시아 측 속기록을 인용해, 소련의 스탈린이 지난 1952년 저우언라이 중국 외교부장과 만났을 때, 유엔군 포로의 20%를 인질로 잡아놓자고 제안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국군을 비롯해 많은 유엔군 포로들이 이미 소련 내 수용소로 비밀리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1950년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됨으로서 37개월 만에 일단락됐습니다. 당시 남한은 국군 8만 2천 여 명이 북측에 포로로 억류돼있다고 추정했지만, 고작 8천 300여 명 만이 송환받은 채 협상이 종료되었습니다. 반면 북한측에게는 7만 6천 여 명이 인도됐습니다.
워싱턴-이진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