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의 주간진단] 북한군, 러시아에서 목숨만 부지해도
2024.10.31
MC: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의 주간진단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MC: 북한 특수군의 러시아 전쟁 파견을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북한군 부총참모장 김영복 상장이 현지에서 북한군을 지휘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요. 북한군의 러시아 배치가 파병인지, 용병인지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안찬일 박사와 이 문제 짚어 봅니다. 안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네, 안녕하십니까.
MC : 최근 들어, 북한 특수군 병사의 러시아 파견 소식이 전세계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데요. 정착 북한은 이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 당국이 북한군인을 러시아로 보낸 것을 두고, 그것이 파병인지 용병인지 가려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안 박사님, 먼저 ‘파병’은 어떤 경우를 말하는 건지 설명 좀 해 주시죠.
안찬일: 네, 20세기 들어 파병이라는 개념은 점차 국가적인 정치적 연루성과 편승에 의한 역할분담의 성격이 짙어졌습니다. 냉전 시대에서의 역할에 있어서 상호 각각 편승된 입장의 존망과 역할에 필요한 조치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대표적으로 6.25 전쟁 때 UN군 파병을 통해 제1세계가 공산주의를 저지하면서 일본처럼 6.25 전쟁에 파병나가지 않아도 군수물자 생산 기지 역할을 한 덕분에 충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한국도 베트남 전쟁 파병 자체의 목적도 자유세계에 있던 남베트남을 지원한다는 입장이 강했습니다. 물론 그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한국군의 현대화 지원과 군수산업 지원을 얻어내어 국군의 주요 화기들이 미군으로부터 공수되어 최신화되었고 파병인원들의 군 보급품 대부분을 한국에서 수출하기도 했었으며 경제 차관도 얻어내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포스코, 카이스트, 국방과학연구소 등의 굵직한 기업 및 기관들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좀 요약해 말씀드리면 자기 나라 국기와 표시, 국적을 공개하면서 국제법 테두리 안에서 참전하는 것을 파병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MC : 그렇다면 용병은 어떤 경우를 가리키는 말인가요?
안찬일: 네, 일반적인 직업군인과, '용병'으로 칭하는 집단과의 차이는 국가에 직속되어 있는가와 금전적 계약을 중시하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병은 보수만 주어지면 의뢰주와의 약속대로 의뢰받은 업무를 해주기 때문에, 의뢰주가 누구든 관계하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당연히 직업 특성상 대부분 군사력이 필요한 분야에서 일하며, 따로 옵션, 그러니까 선택사항으로 이것도 수행해 주겠다고 사전에 계약을 맺거나 혹은 계약을 중도 변경하지 않는 한 일반적인 정규군이 하는 재난 구호 업무 등은 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을 북한군에 적용시켜 보면. 쉽게 말해 일반적인 직업군인은 '직업 공무원'이라면 용병은 사실상 ‘총알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C : 그럼, 요즘 들어 러시아로 가는 북한 특수군은 어떤 형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용병인가요, 아님 파병인가요?
안찬일: 네, 북한 특수군의 성격 규정은 어렵지 않습니다. 당연히 파병이 아니고 용병입니다. 왜 그러냐구요? 우선 첫 번째로 북한 특수군은 순전히 돈 때문에 러시아 전선에 불려 갔습니다. 북한 경제의 파탄으로 평양 정권의 통치자금이 고갈되고 체제유지가 어렵다 보니 “궁하면 통한다”고 러시아 전쟁이 총알받이가 필요했고 김정은 총비서는 이게 웬 떡이냐며 군대 파견을 결정한 것이죠. 두 번째로 현재 북한군은 자기 나라 국기나 부대 표시 등이 없이 마치 마적단이 민가에 스며들 듯 러사아로 잠입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내에 들어가서도 도적고양이들처럼 숨어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러시아 전쟁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MC : 그렇군요. 북한은 과거 베트남에도 인민군 공군과 심리전 부대를 파병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도 비빌리에 진행했으니 역시 용병이라고 봐야겠죠?
안찬일: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북한이 오늘처럼 사회주의 파멸이 오기 전인데다 베트남을 도울 여력이 있어 파병했으니 싸구려 용병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파병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공개를 못했으니 그걸 용병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북한은 당시 90여 명의 비행기 조종사와 100여 명의 심리전 군인들을 보내 대한민국 군인들을 향해 어줍지 않은 심리전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MC : 대한민국의 베트남 파병 당시 그 배경 이야기 좀 해 주시죠?
안찬일: 네, 한국정부의 파병 결정에 따라 제1차 파병으로 제1이동외과병원 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요원 10명 등 140명이 1964년 9월 11일,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항하여 22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도착하였습니다. 이후 제1이동외과병원은 붕타우에 주둔하고, 태권도 교관단은 육·해군 사관 학교와 육군 보병 학교에서 남베트남군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제1차 파병에 이어서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추가 파병을 요청받은 정부는 2차로 후방지원과 건설 지원 임무를 수행하는 2,000명 규모의 비전투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국군의 해외 추가파병에 대한 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자, 경기도 현리에 위치한 국군 제6사단 사령부에서 ‘주월 한국군 군사원조단본부’를 창설하여 평화를 상징하는 뜻의 비둘기 부대로 명명하였습니다. 창설된 한국군 군사원조단은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16일 사이공에 도착하였으며, 사이공 동북방 22㎞ 지점의 디안에 주둔하였습니다.
MC : 당시 한국군의 전력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였었나요?
안찬일: 네, 한국군의 제2차 파병이 있었던 1965년의 베트남 상황은 미국의 강력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호치민 루트를 이용한 북베트남군의 남파가 계속되면서 남부의 전 지역에서 지상전이 가열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는 한국에 1개 사단 규모의 전투 부대 파병을 요청해 왔습니다. 당시 미국은 본토의 예비 병력과 해외 주둔군의 일부를 베트남전에 투입하였기 때문에 주한 미군 2개 사단도 언제 남베트남으로 이동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남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눈부신 활약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전투 병력 부족으로 애로를 겪고 있던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작전 환경에 한국군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국군 전투 병력의 증파를 요청하였다. 한국 정부에서도 “5만 명 선 까지는 무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1966년 3월 20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제26연대와 제9사단의 파병을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수도기계화사단 (맹호부대) 제26연대는 4월 15일 퀴논에 상륙하여 수도사단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제9사단은 10월 8일까지 닌호아 일대에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한국군 군인들은 달라로 월급을 받아 전부 한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하였는데, 그 규모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또 미국이 월남전에서 사용하던 중장비들을 모두 받아 한국으로 실어와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군의 현대 장비도 모두 넘겨받았는데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지혜로 얻어낸 성과들입니다.
MC : 네, 안찬일의 주간진단, 오늘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안 박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안찬일: 네 수고하셨습니다
MC: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