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6.25 한국전의 못 다한 그 말 한마디
2023.07.27
MC: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올해 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일입니다. ‘정전’’이란 말은 전쟁을 잠시 중단한 상태를 가리키죠. 그런데, 북한 당국은 그것을 ‘전승 70주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6.25 한국전쟁에 승자는 없고 오직 피해자만 있을뿐’이란 주제를 갖고, 한국의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이시장인 안찬일 박사와 함께 이야기 나눕니다.
MC :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안 찬 일: 네 안녕하십니까! .
MC : 보도를 통해 알려진 대로, 어제 김일성광장에서는 정전협정 체결 70주년 기념열병식이 진행되었습니다. 북한 당국이 저렇게 하는 이유는 뭘까요?
안찬일: 네, 아마도 북한이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일을 저렇듯 요란하게 기념하는 것이 김정은 취임을 전후해서 라고 생각됩니다만, 3대 세습의 시대에 뭔가 새로운 상징성을 조작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김일성은 항일무장 투쟁, 김정일은 그의 계승자, 그런데 김정은은 태어나자마자 황태자로 뭐 내세울 정통성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7.27 전승절- 이런 것을 들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정일 때는 2.16이 선물 승용차와 선물시계 등에 달려 나왔다면 김정은 시대에는 그것이 7.27로 대체되고 심지어 담배도 최고급 담배는 7.27담배,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김정은 시대의 새로운 상징으로 7.27이 부각되었다고 보여집니다.
MC : 그런데 남한 뿐만 아니라 외부세계에서도 북한의 7.27 전승절 주장은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드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안찬일: 김일성은 1948년 2월 8일 북한 정규군을 창건하면서부터 군사력을 동원한 남침 전쟁을 기획하게 됩니다. 여기에 서울에서 활동하다 월북한 박헌영 남로당 총수가 적극 협력하며 전쟁을 부추기죠. 박헌영은 남한에 권력 기반이 있다고 착각하면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에서 20만 명의 남로당원들이 들고 일어나 한반도 통일은 ‘3일 천하’로 끝난다고 김일성을 부추겼습니다. 겨우 38살의 김일성은 그 말을 곧이 듣고 한민족의 역사적 대재앙이 되는 남침전쟁을 도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까지 헐레벌떡 내려온 북한군과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속았음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농지개혁으로 토지를 분양받은 남한의 농민들은 물론 남한 국민 모두가 공산당의 실체를 알고 있었기에 북한군을 반기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MC : 네, 서울에서 5일 동안을 허비한 북한군이 다시 한강을 건너 남진의 길에 들어설 때는 이미 남한군과 미군, 나아가 유엔군까지 참전하는 방어선이 구축되게 되는거죠?
안찬일: 그렇습니다. 7월 27일 공군기를 타고 한국전선을 시찰한 맥아더 장군은 곧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전시상황을 보고하고 미국 대통령은 UN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유엔군이 한국전선에 투입하도록 하는 놀라운 외교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를 오늘 북한은 16개 나라 침략군이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들은 한국전쟁의 방어자로 참전한 것이지 침략자로 들어온 군대가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일성의 강요된 명령을 받은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하고 대구를 다음 목표로 낙동강까지 헐레벌떡 달려내려 갑니다. 오늘 한국 국민들은 낙동강을 자유의 최후 보루라고 하는데 만약 그때 미군과 한국군이 낙동강을 사수하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번영하는 대한민국은 지도에서 사라질뻔 했습니다.
MC : 북한군의 남진을 멈추게 만드는 결정적인 작전이 펼쳐지죠?
안찬일: 그렇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성공 가능성이 5000분의 1 밖에 안되는 그런 모험적인 상륙작전이었습니다. 희세의 명장 맥아더 원수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작전이었습니다. 맥아더 원수는 원산과 군산 등지에 위장된 상륙작전의 연막을 치면서 인천 앞바다에 해군과 해병대 부대들을 집결시켰지만 초기 북한군은 그걸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북한의 영화에 이대훈 해안포 중대의 전투력을 과장한 <월미도>란 영화가 있는데 그거 너무 조작된 내용입니다. 어떻게 2차 대전 후 최대규모의 상륙작전을 한 개 중대의 해안포가 대적한단 말입니까? 일단 인천상륙작전으로 사실상 한국전쟁의 승산은 끝난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군은 일대 패주자가 되어 북으로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국군이 1950년 10월 1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하자 북한은 강계로 임시수도를 옮기며 김일성도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강계에 집결한 북한군은 3개 사단도 안되었다고 하니 그 패배의 결말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MC : 이때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으로 들어오며 한국전쟁은 다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에 대한 박사님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안찬일: 중국의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의 참전을 결정하면서 <항미원조>라고 표현했는데 그만큼 자신들의 안보 완충지대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오늘 인민들을 굶겨 죽이며 핵무기 개발로 자신들의 속을 썩이는 평양정권보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지 않은 것을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김일성은 작전권을 빼앗긴 채 어정쩡한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사실 전쟁은 조중연합사령부가 운영하는데 그 사령관은 팩덩회 중국군 맹장이고 부사령관 역시 중국해방군 지휘성원과 김웅 북한군 장성이었습니다. 과연 김일성이 1951년 이후 한국전쟁이 끝날때까지 한게 무엇이 있을까요? 그냥 명색만 최고사령관이고 실제는 내각 수상으로 전쟁피해 현장을 찾아다니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러고도 1950년 7월 27일 전쟁이 정전협정 조인으로 휴전되자 제일 먼저 원수별을 달고 영웅처럼 등장했다고 합니다.
MC : 한국전쟁 때문에 발생한 피해규모는 얼마나 됐나요?
안찬일: 네, 한국 전쟁은 대규모 인명 피해를 낳았습니다. 당시 남북한 인구 3천만 명의 6분의 1에 달하는 5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중국군과 유엔군을 합치면 6백만 명에 이릅니다. 한국 전쟁의 비극성은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거나 다친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한의 경우 전체 사상자 2백만 명의 50%인 1백만 명이 민간인 사상자였습니다. 북한은 무려 전체 사상자 3백만 명의 80%인 250만 명이 민간인이었습니다.
한국 전쟁은 대규모 경제적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공장과 기업소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 시설인 관개 시설과 제방, 저수지 등이 파괴되었습니다. 또한 주택, 학교, 병원, 극장, 도서관, 교회 등도 파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나고 전선에서 전사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임진왜란 때보다 더 많이 생겨났으니 가족을 잃은 그 사람들의 원한을 어느 누가 보상해 준단 말입니까. 김일성 정권은 그 당시 어려운 남조선을 해방한다고 전쟁을 도발했는데, 오늘 북한보다 40배 앞선 남조선이 북한을 해방한다고 하면 수락해야 하지 않을까요? 뭐 좀 알고 전승절 타령을 노래 불러야 할 것입니다.
MC :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박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안찬일: 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MC: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담당: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