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기자가 본 인권] 오공단 박사 “여생을 통일 위해 일하겠다”

워싱턴-정영 jungy@rfa.org
202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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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기자가 본 인권] 오공단 박사 “여생을 통일 위해 일하겠다” 다년간 미국의 유명한 국책 연구기관인 랜드와 국방연구원에 몸담았던 오공단 박사.
/오공단 박사.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다년간 미국의 유명한 국책 연구기관인 랜드와 국방연구원에 몸담았던 오공단 박사가 은퇴 후 자신의 인생역정을 다룬 회고록을 발간했습니다. 오 박사로부터 책에는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그리고 앞으로 계획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기자: 오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오공단 박사: 네 안녕하세요?

 

기자: 수십년간 미국의 국책연구기관에서 몸을 담고 한반도 전문가로 일을 해오셨는데요. 그에 대해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다년간 미국의 유명한 국책 연구기관인 랜드와 국방연구원에 몸담았던 오공단 박사가 은퇴 후 자신의 인생역정을 다룬 회고록을 발간했다. /이조출판사
다년간 미국의 유명한 국책 연구기관인 랜드와 국방연구원에 몸담았던 오공단 박사가 은퇴 후 자신의 인생역정을 다룬 회고록을 발간했다. /이조출판사
오공단 박사: 네 제가 1986년 버클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1년 뒤인 1987년에 산타모니카 남가주 캘리포니아에 소재하고 있는 랜드연구소로부터 초청을 받았어요. 그때 초청 당시 원장님이 한국에서 귀화한 미국 시민 특히 여성으로서 내가 처음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굉장히 좋은 연구를 했고, 1995년에 랜드를 떠나서 워싱턴 디씨로 옮겼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에서 좀 더 미국 정책에 깊이 관여를 하고 싶어서요. 그때 이제 미국 국방연구원이 또 저를 초청했어요. 그래서 미국 국방연구원에서도 귀화한 한국계 미국 시민 여성으로서 제1호로서, 쭉 일하다가 2021 3월에 제가 자진 은퇴했습니다.

 

기자:  회고록을 보니까 600페이지가 넘는 많은 분량인데요. 두 연구기관에서 한반도 관련해 특별히 기억하시는 프로젝트나 관련 일화들이 있으면 소개를 좀 해주십시오

 

오 박사: 우선 첫째 랜드 연구소에서는 제가 처음 일을 시작하니까, 원장님이랑 과장님이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그래서 당신이 한국 사람이고 평양 사투리도 할 수 있으니까 북한 문제를 좀 연구해 달라고 그래서 제가 제일 처음으로 연구한 보고서의 제목이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승계 과정에 대한 정치 분석이었어요. 그게 굉장히 미국 정치가들과 의회 또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서그런 일을 계속 했고, 미국 국방연구원에서는 북한 문제, 일본 문제, 중국 문제, 그리고 글로벌 테러리즘 이런 문제들을 굉장히 많이 다뤘었습니다.

 

기자: 미국의 전문가들이 보는 한반도 견해나 또 문제 해결 방향은 어떠했습니까?

 

오 박사: 그러니까 1987년 제가 랜드에서 일을 시작하고 1988년에 제 첫 보고서가 나왔거든요. 그래서 제가 일단 미국 영국에서는 북한 문제라면 오공단이 최고다 이렇게 인식을 받았는데, 1990년대 초에 영변의 핵시설이 위성으로 포착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미국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북한을 그래서 비핵확산 조약, 핵확산 방지 조약에 가입을 시키고 그래서 북한이 사실은 가입을 했죠. 그런데 1990년대 초에 탈퇴를 선언하니까 미국 전문가들이 큰일 났다 그래서 그때부터 해법을 찾으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을 했는데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굉장히 간단해요. 북한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어요.

 

기자: 회고록에 보면 북한의 1차 핵 위기 때 하셨던 브리핑 내용도 있는데요. 박사님께서 주장하시는 북한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오 박사: , 그때 1994년에 소위 북한하고 미국하고 핵 협의 조약을 맺었죠. 그래서 합의(Agreement)를 맺어서 미국에서는 원유를 보내고 북한에서는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고 좀 더 말하자면 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평화적인 핵 발전을 지어주겠다. 이렇게 서로 동의를 했는데 그게 사실은 제대로 되지 않았죠. 그리고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위기가 계속 닥치는데 제가 그때 미국 국방부 장관인 페리 장관한테 드린 브리핑이 있어요. 핵을 아무리 떠들어봤자 소용없다. 왜냐하면 핵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해법은 다른 데서 찾아야 된다 그랬는데 사실은 제 해답이 맞았는데 그게 정책으로 채택이 안 됐기 때문에 오늘 북한은 더 핵을 많이 가진 국가가 된 거예요.

 

기자: 좀 더 정확히 박사님은 북한 문제 해결 방안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박사: 그러니까, 제가 한국에 살던 시절 굉장히 군사독재였거든요. 박정희 시절 그리고 저도 데모도 많이 했고 그런데 국민들이 똑똑해서 결국은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 하고서 민주화를 시작했고 그리고 또 미국이 존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식 모델을 받아서 한국이 사회경제 정치 발전을 시켰거든요. 제가 주장한 해법은 이겁니다. 북한 주민들과 시민들과 국민들이 스스로 알아서 우리도 좀 변화를 하고 개방을 하고 자유롭게 되지 않으면 못 살겠다. 그래서 변화를 요구하고 변화가 오도록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저는 최고의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회고록에는 또 북한의 리용호 초대 영국 대사와 조우했던 그런 일화도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북한 엘리트들을 대하는 나름의 기술을 터득하셨다고 하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오박사: 기술이라기보다는 지난 40년간 북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그랬으니까요. 북한을 떠난 분들만 만난 게 아니라 북한에 있는 외교관들, 그다음에 무역관들, 그다음에 외국에 파견된 대사님들 이런 분들을 직접 만났기 때문에 그분들을 관찰함으로써 생긴 하나의 현명한 결정이죠. 북한 사람들은 항상 우리가 굉장히 중요한 국가니까 너희들 몸 조심해 이런 식으로 하고 이렇게 오히려 관심을 보이면 굉장히 아주 거리를 두고 별로 사람 취급을 안 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북한의 외교관들이나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오히려 무시작전으로 나가요. 그러면 오히려 관심을 보이면서 “아니, 오 여사 왜 우리를 무시하는 겁니까?”하고 이렇게 다가오는 거죠. 그래서 아니, 그분들을 무시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워낙 그렇게 뻣대고 있으니까 저도 이제 그럼 나도 자존심이 있으니까 알아서 해라 그리고, 가만히 영국 사람들이나 프랑스 사람들 이런 사람들하고 원어민 말로 이야기를 하면 자기들이 이제 등이 달아가지고 와서 오 여사, 우리하고 술 마십시다이렇게 접근을 하는 거예요.

 

기자: 북한 문제에 몸 담그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오박사: 제가 버클리에 있을 때 저의 스승님이 이거 봐 내가 굉장히 커다란 돈을 미국 정부로부터 받았는데, 북한을 좀 자세하게 연구해 달라고 그런데 내가 한국어도 모르고 특히 북한 사투리도 모르니까 자네가 내 조교가 돼서 같이 일하자고 하면서 굉장히 사례금을 많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물론이죠. 하고 시작했는데 저는 처음에는 북한이 그냥 한국은 민주주의고 북한은 공산주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건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괴상한 공산주의인 거예요. 말하자면 김씨 왕조랄까 그래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 이제 랜드에 입사한 뒤에 계속 북한을 연구함으로써, 지난 30~40년 연구를 했기 때문에 북한 전문가로 일단 명성을 얻은 거죠.

 

기자: 네 회고록을 보니까 부모님 고향이 북한이신 것 같은데요.

 

오박사: 네 맞습니다.

 

기자: 혹시 인생의 본보기로 모시는 분이 있습니까?

 

오박사: 그러니까 저희 아버님이 일제시대 때 평양사범학교를 나오신 소위 평양의 수재라고 불리던 분이시거든요. 그러다가 북경에서 대학 공부하시고 한국에서 교수로 계시다가 사망하셨는데, 저희 아버님이 저에게 늘 하시는 말씀이 “학자는 진실을 말할 때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진실을 거부하지 않고 진실을 밝혀야 되고, 불의와 정의 앞에서 정의를 위해서 싸울 줄 아는 그런 힘을 길러야 되고, 그 다음에 검소하게 살고, 물욕을 가지지 말고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이 마음을 평화롭게 먹어야지 결국은 진정한 인간이 된다” 그랬기 때문에 아버지가 저희 처음 멘토였어요. 두 번째 멘토는 저희 남편 미국 사람인데 그렇게 공정할 수가 없어요. 공정하고 공평하고 정직하고 제가 좀 과장해서 자기 자랑을 하려고 그러면 저희 등을 꾹 눌러요. 너무 그렇게 자랑하지 말라고 그리고 길 가다가 노숙자가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면 저는 10불을 주려고 하면 그러거든요. 보통 미국 사람 1불도 안 주잖아요. 그런데 10불 주면 많이 줬다고 생각하는데 저희 남편이 얼마나 급하면 돈을 요구하는 노숙자겠느냐? 오십불을 줘라 그래요. 그래서 저 남편한테 배우기 때문에 남편이 두 번째 멘토에요.

 

기자: 네 회고록을 보니까 동물을 사랑하는 동물 애호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혹시 간단히 예를 들어 고양이는 어떤 면이 귀엽습니까?

 

오박사: (웃음)저희 집에는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 고양이 많았고요. 형제들이 몸이 약하니까 우리 부모님이 염소를 고아 먹으면 몸이 튼튼해진다고 그래서 작은 염소를 한 마리 구했는데, 우리가 그것을 우리를 위해서 구워 먹인다는 말을 듣고 다들 울고 그래서 결국 염소도 우리 집의 애견 동물이 됐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고, 그 다음에 한국 사람들 개고기 먹는 거 반대해서 한국에서 글도 많이 썼고, 그 다음에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저는 연구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강아지는 너무나 사랑이 많기 때문에 저를 쳐다보고 하루 종일 저만 쳐다보니까 제가 거기에 메여 갖고 공부를 못해요. 그런데 고양이는 자기 공간과 시간을 존중할 줄 아는 독립적인 개성이 있거든요. 그래서 고양이를 굉장히 사랑하고 사람들이 개보다 고양이가 머리가 나쁘다고 그러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제가 외국 여행을 가려고 여행 가방을 내놓으면 우리 고양이가 둘이 들어가서 앉아가지고 “엄마 가지 마” 이런 표정을 짓고 앉아 있어요.

 

기자: 수십 년간 몸을 담으셨던 랜드와 국방연구원을 떠나 자유로운 몸이 됐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오박사: 자유를 선택한 이유가 간단해요. 국가 최고 기밀을 다룰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있으면서 항상 제안을 받고, 규정에 구속되는 것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미디어도 상대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 아마 오늘 이 RFA  인터뷰 같은 것도 제가 연구원에 있으면 허가를 받아야 돼요. 앞으로 글도 많이 쓰고 그래서 북한이 점점 변할 수 있도록 여러 사람들하고 협력해서 도와주고 또 그들이 변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유도해 내고요. 저는 세계적으로 인적관계가 굉장히 깊고 넓기 때문에 그런 네트워크을 이용해서 앞으로 남은 삶을 북한의 변화와 통일을 위해서 일하려고 합니다.

 

기자: 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획한 일들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오박사: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한반도 한반도 전문가 오공단 박사로부터 회고록을 집필하게 된 계기와 앞으로 계획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정영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기사 작성 정영,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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