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고향 땅에 건물 짓고 싶어요”

워싱턴-정영 jungy@rfa.org
20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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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제1터미널.
미국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제1터미널.
Photo courtesy of Doug Letterman/Wikipedia

<탈북기자가 본 인권> 진행에 정영입니다. 고향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10여년, 그리고 또 태평양을 횡단하여 자유를 찾아 미국땅에 가족과 함께 온 김요한씨, 하지만 미국땅을 밟은 김씨에게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생소한 땅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어려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서 제도권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미국에 온 요한군과 같은 탈북청소년이 미국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김요한군은 도저히 오르지 못할 것이라 보이던 고등학교의 벽을 넘어 커뮤니티 칼리지, 즉 단과대학을 다니다가 지금은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다고 합니다.

<탈북기자가 본 인권> 오늘 시간에는 미국 동부 메릴랜드 주에 정착한 함경북도 온성군이 고향인 김요한군의 미국 정착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기자: 자, 몇 년도에 미국에 오셨나요?

김군: 2014년 7월에 미국에 왔습니다.

기자: 혹시 북한에서 언제 떠났는지, 탈북생활은 어떻게  했는지 간단하게 말씀을 좀 해주시겠어요?

김군: 언제 북한에서 떠났는 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요. 부모님으로부터 듣기로는 저희가 5~6살에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아는 교회 집사님 집에서 지내다가 거기서 공부도 좀 하고 영어도 배웠습니다.

김씨 가족이 중국에 있을 때는 아빠와 엄마는 산속에서 따로 숨어 살고 김군과 김군의 형은 조선족이 운영하는 교회에서 살았다고 하는데요. 그때 배운 영어가 미국으로 오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자: 그럼 중국에서 미국에 오려고 결심을 하고 영어를 배웠나요?

김군: 아닙니다. 부모님이 갑자기 찾아오셔서 미국 가자고 하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기자: 그러면 그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오셨나요? 아니면 미국에서 오셨나요?

김군: 아닙니다. 듣기로는 캐나다 기독교 단체에서 오신 분들이 도와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과 연결되어 (우리가)한국 분들과 지내면서 공부를 조금씩 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이 함경북도 온성군인 김군의 부모는 2000년대 중반 식량을 얻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김군의 부모들은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온성군 맞은편에 있는 중국 길림성 왕청현의 깊은 산속에서 농사일을 하고, 아이들은 조선족 교회가 운영하는 한글학교에서 영어와 한글을 익혔다고 합니다.

질문: 그러면 중국에 있을 때는 아빠와 엄마가 따로 살고 그리고 형제와 형은 교회안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그 영어가 미국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나요?

김군: 네 도움이 되었습니다.

기자: 언어는 어려서 해야 기초가 탄탄 해지는데요. 그러면 어느 나라를 거쳐서 미국에 오게 되었나요?

김군: 저희가 중국 곤명에서 라오스의 강을 건너서 태국에 도착해서 거기서 이민국에 들어갔지요. 거기서 9개월 지냈어요.

기자: 그러면 태국 이민국에서 9개월 지내면서 조사를 받았겠지요?

김군: 네 그게 좀 오래 걸렸습니다.

기자: 미국 조사기관에서는 진짜 북한 사람인지 가려내야 하는데, 김군의 가족은 가족단위이기 때문에 서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조사가 빨리 끝난 것 같은데요. 다른 분들의 경우는 2~3년씩 걸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처음에 미국에 도착할 때 나이가 얼마나 되었나요?

김군: 17~18살이었습니다.

기자: 어떻게 보면 북한 남자 나이로 치면 군대 나갈 나이인데 그때 나이 학생들은 미국 고등학교 에서는 몇 학년인가요?

김군: 그때 내 나이는 졸업하는 나이였습니다. (미국 학교규정에)나같은 사람이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면  22살 전에는 졸업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그때가 17살이니까4년을 배우면 22살 이전에 졸업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들어갈 수 있었고, 우리 형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김군처럼 난민으로 미국에 입국한 청소년들은 미국 공립학교에서 무료로 공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열여덟에 미국에 입국했기 때문에 마땅히 편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측과 논의 끝에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학년에 편입되어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고 김씨는 말합니다.

기자: 미국에 어렵사리 제도권 학교에 들어갔는데, 미국에서는 사업을 하든, 군대를 가든, 어떤 일을 하든 고등학교 정도는 졸업해야 하거든요. 처음에 미국 어느 고등학교에 들어갔나요?

김군: 랜스타운 하이스쿨이라고 볼티모어 카운티에 있는 작은 학교에 갔습니다.

질문: 미국의 교육을 받기가 어렵지 않았나요?

김씨: 처음에는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말을 하지 않고, 지내면서 최대한 보고 듣다가 1년 지나서 아이들과 친해지고, 선생님들과 애기를 하고, 대충 어떤 이야기를 한다, 수업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04년 미국에서 북한인권법이 통과되면서 북한 주민들도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난민을 지원하는 정착 프로그램에 따라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입국한 북한 청소년들은 미국 공립학교에서 무료로 공부할 수 있습니다.

기자: 그러면 고등학교는 모두 몇 년을 다녔 나요?

김군: 3년 다녔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 굳이 시험을 칠 필요 없이 수업 과정만 이수하면 자연히 졸업합니다.

기자: 그러면 시험때문에 통과되고, 통과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군요.

김군: 네, 그런데 너무 낙제점을 받으면 수업을 다시 들어야 하겠지만, 그 이상이면 자연스럽게 졸업을 해요.

기자: 고등학교에서는 어떤 과목을 배웠나요?

김군: 기본적으로 영어가 9, 10, 11, 12학년마다 있고, 사회, 수학, 역사, 과학 이렇게 배워줍니다. 체육은 9학년때 처음 해보았습니다.

기자:  그 가운데서 가장 어려웠던 과목은 어떤 과목이었습니까?

김군: 사회랑 영어 과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사 과목이요.

기자: 사회는 작문을 많이 해야 하고요. 그리고 역사는 미국 역사를 배울 것이고, 사실 영어는 나도 힘든데 늙어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웃음)

기자: 자, 그러면 학교에서 동료들과의 관계는 원만했나요?

김군: 네 친구들도 제가 우선 ESL(영어를 제2국어로 배우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 클래스를 같이 들었으니까, 학교에는 영어 클래스가 있고, ESL클래스가 있었는데, 이 클래스는 외국에서 온 친구들이 배우는 수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 친구보다는 오히려 외국 친구가 많아요.

기자: 그러면 인도계 중국계 이런 친구들이요?

김군: 네, 중국이나 인도, 스페니시, 그리고 다른 남미계 학생들이요.

기자: 오히려 영어를 배우는 데는 그런 친구들이 더 편안해요. 그러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대학이나, 전문대학에 진학하려는 노력을 좀 해보았나요?

김군: 그때는 제가 아는 분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스럽게 여기 몽고메리 칼리지 다니면 좋다고 해서 들어가 보았어요.

기자:  그러면 전공은 무엇이었나요?

김군: 그때는 여러가지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건축 쪽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1년 조금 넘게 다니다가 지금은 쉬고 있습니다.

기자: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에 있는 몽고메리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공부를 했는데, 북한으로 치면 단과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셈이군요. 그러다가 이젠 다른 목표를 위해 경제적으로 돈도 좀 벌려고 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10대 난민청년들이 미국에 오면 어떤 절차를 밟아 학교에 가고,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등 경험을 했는데, 혹시 10대 청소년들이 가장 필요한 게 어떤 것인지, 무슨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나요?

김군: 첫째는 언어가 제일 힘들겠지요. 그걸 주변에서 가르쳐주는 분이 있었으면 많이 편할 것 같아요. 제가 다닌 고등학교에는 아예 한국사람이 없어서 좀 더 빨리 배우긴 했는데, 만일 누가 가르쳐주었다면 더 빠를 수 있었죠.

기자: 멘토가 필요했다는 소리군요. 사실 미국에 영어를 배워주려는 사람은 많은 데 영어와 한국어를 아는 그런 사람들이 “이런 문장은 이렇게 해석된다”고 차근차근 알려주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말이군요.

기자: 그러면 북한 고향 아직도 생각하세요?

김군: 기억은 없어서요. 궁금은 한데 어떤 곳인지 잘 모릅니다.

기자: 지도상으로나 북한을 보면서 저기가 내 고향이다고 생각할 텐데, 앞으로 고향 북한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싶나요?

김군: 어릴 때는 건축일을 하고 싶었던 것은 만일 통일이 되고 나면 거기다 건물을 짓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기자: 미국에는 빌더라고 하는 직업도 있고, 그리고 사실 건축 쪽에도 상당히 기회가 많은데, 여기서 잘 배워 가지고 고향 북한 땅에 미국식 건물을 지었으면 좋겠네요.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김군: 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함경북도 온성군이 고향인 김요한군의 미국 정착 이야기를 보내드렸습니다. <탈북기자가 본 인권> 오늘 시간을 마칩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정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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