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진단 한반도] 왜곡된 ‘북침’ 한국전쟁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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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시사진단 한반도’ 시간입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목용재입니다. 지난 목요일은 북한이 ‘전승절’이라고 주장하는 정전협정일이었습니다. 북한은 정전협정일을 ‘전승절’로 왜곡하고 있는 만큼 한국전쟁과 관련한 여러 사실도 왜곡해 내부 선전에 활용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고영환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연구위원이 이 같은 북한의 거짓 선전을 바로 잡아 주시겠습니다.

목용재: 지난 목요일은 한반도에서 정전이 된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었죠?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아직도 한국전쟁이 한국의 선제 공격, 즉 '북침'으로 시작됐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먼저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도자가 누구였는지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영환: 한국전쟁에 대한 비밀은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공개한 비밀 문서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의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넘겨준 비밀문서들에 의하여 전모가 밝혀졌습니다. 해당 비밀 문서들에 의하면 김일성 주석은 1949년 3월 3일부터 20일까지 박헌영 부수상 등을 데리고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1949년 3월 7일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을 찾아가 무기와 장비 지원 등 군사 원조를 요청하고 남침 허가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김일성의 인민군대가 한국 군대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지 않은 등의 이유를 대며 거부했습니다. 이날 김일성은 "지금 우리가 전체 한반도를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고 믿는다"며 스탈린을 설득했습니다. 그의 간청에도 스탈린은 남침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3월 17일 조·소 군사비밀 협정을 맺은 후 소련은 북한에 6개 보병사단, 3개 기계화 부대, 8개의 국경 수비대대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를 제공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스탈린을 다시 찾아가 남침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 국제국이 작성한 문서에 의하면 1950년 4월 10일 회담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요청을 허가했습니다. 1949년 5월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서한을 보내 중국인민해방군의 3개 조선족 사단들과 기타 조선족 장병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모택동이 이를 허락했습니다. 1949년 9월 20일, 중국군 164사단과 166사단이 북한으로 건너와 북한군 5사단과 6사단으로 편성됐습니다. 중국군 독립 15사단은 북한에 건너 온 후 인민군 12사단으로 편성됐습니다. 더욱이 김일성은 해방 후 북반부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각 공산세력들을 유인 및 포섭했고, 남로당 출신 박헌영과 결탁해 소련과 중국의 승락 하에 남침을 강행했습니다.

목용재: 결국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은 김일성이었다는 말씀이시군요. 한국전쟁 초기 상황은 어떻게 전개됐나요?

고영환: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가하고 소련군 중장 바실리에프 장군의 지휘 하에 120명의 특별군사고문단으로 하여금 남침 작전 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휘에 따라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분계선 전역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북한군은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남북의 전력차가 너무 심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육군 병력은 한국군의 2배였습니다. 북한군은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단련된 5만여 명의 조선인 부대를 포함한 10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 3개 독립연대 등 18만2000명이었습니다. 대신 한국군은 8개 보병사단과 2개 독립연대 등 9만 4000명이었습니다. 개전 당시 북한군은 스탈린이 지원해 준 T-34 탱크가 200대가 넘었으나 한국군은 전차가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공군의 경우 북한군은 전투기 등 211대가 있었지만 한국군은 연락기와 연습기 22대가 전부였습니다. 압도적인 전투력의 차이와 남한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한국군은 낙동강까지 속수무책으로 물러났습니다.

목용재: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당시의 월미도 전투와 낙동강 전투를 내부 선전에 활용하던데요. 영화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내 선전에 활용할 만큼 당시 전투에서 북한이 격렬하게 저항한 것인가요?

고영환: 북한에서는 낙동강 전투와 월미도 전투가 유명합니다.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했고 유엔군을 한반도로 파견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지금도 안보리는 만장일치로 의사결정을 하는데요. 당시 중국 몫은 대만이 가지고 있었으니 소련만 반대했다면 유엔군은 없었을 것입니다. 의문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던 소련이 안보리 회의에 불참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한국전쟁을 배후에서 조종한 소련이 이를 부담스럽게 여겨서 유엔군의 한국전쟁 참전 반대를 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제기됩니다. 낙동강을 두고 북한군과 유엔군 그리고 한국군이 결사적인 전투를 벌였는데요. 한국에서는 낙동강 전투를 다부동 지역 전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낙동강 유역의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이 진군을 멈췄는데요. 전쟁의 교착 상태를 풀기 위해 미국의 맥 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펼칩니다. 북한에서는 이에 대해 월미도 해안포 중대가 유엔군을 막아냈다면서 영화도 만들어 졌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새벽 2시 7만 5천명의 상륙병력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월미도는 북한군 제64해안보병연대와 제226해안포병대대의 400여 명이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6시 27분, 17척의 상륙함이 월미도를 향해 진격했고 3분만인 6시 30분 상륙함이 해안에 도착하며 월미도를 점령했습니다. 북한군 400명 중 108명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136명이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 100여 명 이상이 동굴 속에 파묻히면서 월미도 전투가 단시간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당시 전투를 날조해 해안포병들이 3일 동안 섬을 사수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목용재: 중국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증원병력을 보냈고 이를 계기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요. 북한은 중국군의 참전을 보조적인 역할 정도로만 교육합니다. 실제 당시 중국군의 역할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고영환: 6.25 전쟁 초기에 북한군이 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른바 '전략적 후퇴'를 한 이후부터는 중국군이 대부분 전선에서 유엔군 및 한국군과 싸웠습니다.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는 1950년 11월 11일 모택동에게 "중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오인 사격이 여러 차례 발생. (중국군과 북한군 사이) 통일된 지휘가 필요. 북한군, 산에 들어가 토비가 돼"라는 보고를 했습니다. 팽덕회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김일성, 슈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 대사 3인이 북중 연합군을 지휘하도록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이에 스탈린은 1950년 11월 16일 모택동과 김일성, 슈티코프에게 "3인 소조를 구성할 게 아니라 북한과 중국의 연합사령부를 구성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스탈린은 연합군 사령관은 중국이, 부사령관은 북한이 맡도록 절충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2월 8일 북중 연합사령부가 조직됐습니다. 중국을 전면에 내세운 소련은 막후에서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중국군은 전선 서부, 중부에서 유엔군과 싸웠고 북한군은 전선 동부 일부 지역에서만 싸웠습니다. 1950년 10월부터 휴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북한편에서 싸운 중국 지원군 숫자는 240만 명이 넘습니다.

목용재: 남과 북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3년 동안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은 7.27 휴전일을 전승절이라고 왜곡하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고영환: 북한은 미제가 16개국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얻은 것은 시체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릅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등 세계 여러나라들의 역사 문헌에 따르면 한국전쟁 시 한국군 사망 13만 7천명, 연합군 사망 3만 7천 명에 비해 북한군 사망 52만 2천명,중국지원군 사망 14만 8천명으로 평가돼 있습니다. 북한이 입은 피해가 훨씬 크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한국전쟁을 "미제를 타승한 위대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많은 희생을 치르는 전쟁을 시작한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춰 선 날을 전승절이라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입니다. 식량난으로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전승을 기념한다며 열병식을 감행한 것도 초라한 북한의 현실을 감추고 주민들의 불만을 가라앉히려는 꼼수에 불과합니다.

목용재: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전쟁에 대한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고 하는데요. 북한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들도 이번 방송을 통해 한국전쟁의 진실과 북한 당국의 선전이 거짓이라는 점을 아시게 됐길 바랍니다. 오늘도 고영환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연구위원과 함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영환: 감사합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