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정경화 씨⑧ 한국 정착

워싱턴-이원희 leew@rfa.org
200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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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여성시대에서는 격주로 탈북여성들의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함께 나누는 아직도 못 다한 이야기를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북한에서의 생활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숨어 살던 사연 그리고 제삼국을 통해 목숨 걸고 한국으로 들어오기까지의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동안 정경화 씨의 얘기를 들으셨는데요, 이제 그 모든 힘들었던 과정을 거쳐 한국에 정착하는 얘기 그리고 근황을 전해줍니다.

질문) 정경화 씨 지난주 방콕 난민수용소에서 겨우 나와 한국으로 들어온 얘기 까지 들었어요. 오늘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얘기해 주시죠.

네. 중국에 있을 때는 중국이 북한에 비해 너무 잘 살고 중국 사람들이 제일 잘 살고 지상낙원인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면서 보니 내가 두 번 다시 태어난 인생 같으면서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이 꿈이면 어쩌나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날만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질문)그런데 그동안에는 너무 자유가 없이 억압된 생활을 하다 너무 자유가 많으니까 그 점이 어렵다는 탈북자들도 계시던데 정경화 씨는 힘들이 않으셨어요?

아니요, 북한에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숨 막힌 감시와 통제 속에서 너무 강요를 당하면서 아주 숨차게 살았어요. 그러다 중국에 가서도 신분이 보장되지 못해 쫓겨 다니고 불안에 떨며 살다 보니 말이 사람이지 한편 짐승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로버트로 만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 생활을 해왔는데 한국에 와서는 너무 자유롭고 사는 것이 풍족하니까 말로는 다 못하겠어요.

질문) 북에서 오신 분들은 한국이 자본주의 사회라 무엇이든 자기가 노력해서 경쟁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것도 힘들었다는 분도 있어요.

북한도 90년대 까지만 해도 배급도 주고 무상으로 치료도 해주고 강압적으로 살았지만 그래도 살면서 시달리거나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김일성이 죽은 다음부터는 눈에 띄게 나타났어요. 김정일이 독재하면서 배급도 떨어지고 병원에서 무상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든 혼자살 수 있어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화 된 거예요. 다 자체로 하니까 그 속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94년부터니까 벌써 10년이 넘어 지났기에 북한식 자본주의도 북한사람들 몸에 배서 살아가는데 능숙해졌어요. 능숙해지니까 한국에 와서도 모두 살아가는데 적응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도 응당 내가 벌어서 살아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개척해야 한다는 각오가 있어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북한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한국에서야 너무 자유롭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니까 힘든 것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어요.

질문) 아무래도 식량배급이 안 되고 어떻게든 자체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데 일자리도 없고 할 수 있는 길이 아무것도 없으니.... 정경화 씨는 한국에 오시면서 바로 일을 하셨나요?

우리는 맨몸으로 한국 땅에 왔잖아요. 한국 사람을 보니 다 자기의식이 있어요. 그래서 저도 잘살기 위해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야 한다는 자각이 생기더라고요 팔다리 다 있지 다른 사람처럼 신체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데 비록 여기서 조상이 물려준 재산은 없지만, 이제부터 노력하면서 살면 왜 내가 남만큼 못 살겠는가, 그리고 하나원 교육기관에서 우리에게 얘기해 준 것이 있어요. 한국에 왔다고 해서 다 잘 사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길게 잡아서 10년 정도 보고 노력해 보라 그러면 잘 살 수 있다고 얘기하셨어요. 그때 하나원에서 선생님들이 해주신 말씀이 항상 기억에 남아 점점 재산이 불어나 큰 재산이 생기고 노력한 만큼 되는 거다, 여기 한국 사람들도 처음부터 잘 사는 것은 아니지 않아요 그래서 나도 희망을 가지고 잘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어요.

또 내가 잘 살아야지 혹시 통일이 되더라도 갑자기 사라졌다가 내 자녀, 형제들한테 뭐 몇십 년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그때 만나면 그래도 떳떳하잖아요. 이런 생각으로 한국에 오자마자 아르바이트시간당, 일을 했어요. 생활수급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생활수급자 보장을 받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제가 하나원에서 나온 때가 5월 중순이었어요. 그래서 농촌에 가서 농사일을 도왔어요. 벼 모 날라주고 뭐, 벼 모 이앙기로 다하니까 기계로 모를 꼽더라고요 이런 일을 해서 하루 일당 4만 원 씩 받아서 한 3일 정도 했어요.

그런데 중국을 탈출하면서 한국으로 오기까지 일을 하지 않아다 갑자기 일을 하니 힘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좀 쉬다가 식당에서 서빙 하는 것, 식당에서 손님들을 접대 하는 일을 했어요. 본격적으로 한 일은 11월부터 냉동만두 공장에서 일했어요. 중국에서 살 때 중국 사람들이 밀가루 음식을 주로 먹었어요. 빵도 있지만, 만두는 중국에서 기쁜 날 잔칫날 먹는 것이 만두거든요. 그 만두를 손으로 직접 잘 만들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도 만두는 손으로 만드는 수공업으로 생각해서 중국에서 만두를 잘 만들었으니 그런 회사에 가서 무턱대고 가서 일을 했어요. 두 달 정도 일했는데 만두도 다 기계로 하더라고요. 처음에 일은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중국에서 농촌으로 팔려가 농촌 일을 했기 때문에 허리가 너무 아프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요.

그래서 두 달 일하고 병원생활을 한 달 했어요. 나만 이런 일을 견디지 못하고 아픈가 했더니 북한에서 온 사람들 보니 다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못하더라고요 아파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해요. 그래서 나도 병원에 가서 진찰 받아보니 허리 디스크 라며 오랫동안 허리를 많이 무리하게 써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이 치료 받기 전에 남한에는 탈북자들 돌보는 지원단체가 많잖아요, 대한 적십자사 라든지 동사무소 그리고 보안계 형사들 다 우리의 안전을 맡은 분들인데 그분들이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정보를 주면서 얘기를 해 주세요. 한국에서 살려면 마음의 준비도 있지만 한국 사람들처럼 어떻게 사는가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요. 무엇보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는 지원대책이 있다며 민영의료 보험이 있다고 알려주었어요. 이 보험에 들면 만약 아파서 병원에 갈 경우 치료비를 다 해준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때, 작년 9월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국 사람들이 그런 보험을 다 들고 사는데 이것이 필요하고 좋기에 보험을 들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도 남들 드는 만큼 보험을 들어야 하겠다는 마음에 보험을 들었어요. 그래서 허리가 아파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보험으로 입원비가 다 해결되었어요. 그리고 병원에 있는 동안 일을 못해도 병원비와 하루 일당 보험지급이 돼서 남들 일한 만큼의 수입이 돼 보험 덕에 잘 견디었어요.

질문) 정경화 씨는 한국에 오자마자 탈북자들의 사회적응 교육 기관인 하나원이라든지 한국 사회에서 알려진 그대로 정상적인 길을 잘 밟았기 때문에 적응이 빠르고 쉬웠던 것 같아요 착한 모범생 같으세요.

웃음 감사합니다.

질문) 정경화 씨 병원치료 받은 후 지금은 어떤 일을 하세요?

지금은 승용차나 화물차에 기름을 넣어주는 주요소 있잖아요. 주요소에서 일하고 있어요.

질문) 그러세요, 그 일도 서서하는 일인데요, 힘들지 않으세요?


주유소의 일은 바쁠 때는 바빠요. 하지만 계속 차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들어올 때는 많이 들어오지만 안 들어 올 때는 앉아서 쉴 수 있어서 일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질문) 힘들지 않으시다니 다행이고요 지금은 처음보다 그 일을 많이 배우셨어요?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하니까 이야기해 주고 알려주어도 뭐가 뭔지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왜 내가 이렇게 헐한 것도 몰랐나하는 의문이 생겨요. 지금은 주유소 사장님이 안 계시고 옆에 주유원이 없어도 혼자서 다 할 수 있어요.

이른 시간에 많이 배우셨네요. 얘기 듣다 보니 시간이 다됐네요. 그동안 오랜 시간에 많은 얘기를 해 주셨는데요, 정말 아직도 못다 한 얘기였어요. 다음 시간이 정경화 씨의 마지막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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