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6·25 전쟁 발발의 진실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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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8월 31일 밤 폴란드군 군복 차림의 나치 독일의 친위대 군인들이 폴란드와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독일의 소도시 글라이비츠(Gleiwitz)의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합니다. 그리고는 독일에 대한 전쟁 선언문을 낭독합니다. 몇 시간 후인 9월 1일 새벽 나치 독일군은 전격전을 펼치면서 폴란드 침공에 나섭니다. 나치 공군기들이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는 가운데 여러 면에서 열세인 폴란드군을 밀어부쳤고, 폴란드는 한달만에 나치군과 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지도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대학살이 이어졌습니다.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었습니다. 이렇듯 나치 독일은 사전에 침공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한 후 폴란드가 독일을 먼저 공격한 것처럼 자작극을 벌이고는 폴란드를 침공했습니다.

1950년에는 한반도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매국적인 리승만 도당의 괴뢰군대가 오늘 이른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불의의 무력침공을 개시하였다. 우리는 결정적인 반격으로 무력침범자들을 소탕해야 한다...” 이것은 6월 25일 열린 북한의 비상내각회의에서 당시 김일성 수상이 한 말입니다. 하지만, 비상내각회의가 열린 것은 북한군이 새벽 4시에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을 개시한 후 수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1950년 6월 7일 김일성 수상은 '평화적 조국통일 호소문'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남북 총선거를 위한 남북 대표자회의를 6월 15~17일 개성에서 열자고 제안했고, 6월 10일에는 북한이 억류 중인 조만식과 남한에 수감된 남로당 지도자 김삼룡·이주하를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며, 6월 19일에는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국회대표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북한의 이런 평화공세 속에 남한은 전쟁을 상상하지도 못한 채 6월 23일 밤 전군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24일 토요일에는 장병들의 외출과 외박은 물론 농번기 휴가까지 시행했습니다.

이처럼 북한은 평화공세로 전쟁계획을 은폐하다가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기해 남침을 개시한 것입니다. 북한군 기동부대는 서쪽의 옹진반도에서 동쪽으로 개성, 춘천, 양양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고, 주력부대인 제1군단은 서울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남침 당시 북한군의 전력은 한국군에 비해 병력 2배, 항공기 10배, 야포 8배 등으로 우세했고, 한국군에는 단 1대도 없는 탱크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북한군은 압도적인 전투력 우세를 앞세우고 사흘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한달 후인 7월 말에 한국 국토의 90%를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남침을 인정한 적은 없습니다. 북한의 모든 문헌들은 6·25 전쟁을 '미제의 사주 아래 리승만 정권이 벌인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불의의 무력침공'으로 기록하고 있고, 인민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치밀한 사전계획과 전쟁준비를 마친 북한군이 기습 남침을 감행하여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했던 전쟁을 '미제와 리승만 정권이 합작한 북침전쟁'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 소련의 전쟁관련 문서들이 하나둘 비밀에서 해제되면서 '북침설'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러번에 걸쳐 확인되고 있습니다. 1993년에 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문서에 의하면, 1949년 3월 북한이 소련에게 남침계획을 상의했을때 스탈린은 남한에 미군이 있다는 이유로 찬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미군이 철수한 후인 1950년 3월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 부수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재차 남침계획에 대한 동의와 지원을 구하자 스탈린은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과도 상의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김일성 수상은 1950년 5월 13일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으로부터 지원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후 북한의 남침준비는 속도를 더해갔고, 소련이 지원하기로 약속했던 무기와 장비들도 5월말 까지 모두 북한에 도착했습니다. 이렇듯 6·25는 북한이 사전에 계획하여 소련과 중국의 지원 하에 도발한 전쟁이었습니다. 이후 유엔이 북한을 도발자로 규명하고 유엔군을 파병함에 따라 평양정권의 적화통일 꿈은 무산되었지만, 어쨌든 이것이 200만여 명의 한국군·유엔군·북한군·중공군 사상자, 수십만 명의 민간인 피해자 그리고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들어낸 참혹했던 6·25 전쟁의 진실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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