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한중관계 격랑 예고한 시진핑 주석의 항미원조 연설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2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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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6일 서울 남산의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서는 안 의사 순국 110주기 추모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대한민국의 독립투사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제시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을 지내고. 1905년 한일 을사보호조약 체결에도 깊이 관여하여 한국에서는 일제침략의 원흉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안 의사는 일제 헌병에 체포되어 이듬해인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되지만, 한국에서는 안 의사의 의거일을 추모일로 정해 매년 그를 추모합니다. 같은 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과 구미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41주기 추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흉탄에 숨지기 전까지 18년 동안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부국강병을 이끌었던 지도자입니다.

10월 25일에는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 별세 소식이 톱 뉴스로 보도되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선친인 이병철 회장이 설립한 삼성 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재계의 큰 별이었지만, 2014년 4월 심근경색증과 신부전증으로 쓰러진 이후 6년반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면서 투병 생활을 해왔었습니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 재임동안 자산규모 10조원에서 자산규모 800조 원에 40만 명이 넘는 인력을 고용하는 한국 1위의 기업으로 자리잡았으며, 삼성의 주력기업인 삼성전자는 최첨단 가전제품들을 생산하는 세계 최일류 기업으로 발전했습니다. 오늘날, 세계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워싱턴, 뉴욕, 베이징, 런던, 프랑크프루트, 아부다비 등 전 세계 곳곳에 설치된 삼성의 대형 광고판을 보면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렇듯 10월 동안 굵직한 뉴스들이 많았지만, 한국인들이 무거운 심정으로 지켜본 것은 10월 23일 시진핑 주석의 항미원조(抗美援朝) 연설이었을 것입니다. 시 주석은 베이징 인민대회장에서 열린 한국전쟁 참전 70주년 행사에서 다시 한번 '항미원조, 즉 6.25 전쟁을 중국이 침략자인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운 정당한 전쟁이라고 강조했으며, “어떤 세력도 조국의 신성한 영토를 침범하고 분열시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 “그런 엄중한 상황이 발생하면 중국 인민은 정면에서 통렬하게 공격할 것" 등의 강력한 발언들을 쏟아냈습니다.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한국전쟁 참전 기념행사에서 직접 연설을 한 것은 2000년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이후 20년 만입니다.

여기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은 중국이 자국의 인민들에게 왜곡된 한국전쟁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자유이겠지만, 왜곡된 역사를 세계에 강요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로 봅니다. 6∙25는 북한의 남침계획을 소련과 중국이 승인하고 지원을 약속하면서 시작된 전쟁입니다. 김일성 주석은 남침을 위한 군사력 증강을 진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침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을 만났고, 5월에는 베이징으로 가서 마오쩌둥 주석을 만나 남침계획에 대한 최종 승인을 받습니다. 전쟁 직전 한국군의 병력은 10만6천 명 정도였지만, 북한군은 두 배인 19만 8천 명으로 증강되었고, 야포 등 각종 전쟁장비들을 많게는 열 배 이상 보유했습니다. 한국군에는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었지만 북한군은 240여 대의 소련제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이렇듯 철저하게 준비한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소련제 전차들을 앞세우고 남침을 개시하여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쾌속 진격하게 됩니다. 이후 유엔이 북한은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을 참전시키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북한군이 북쪽으로 패주했을 때 북한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것이 중공군이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몸으로 겪은 참전용사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데도 북한과 중국의 역사책에서 6∙25가 북침전쟁으로 그리고 미군이 침략군으로 묘사되고 있음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10월 24일 주한 터키 대사가 한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습니다. “6∙25에서 터키군은 죽어서 한국의 아들들이 되었다.” 이것이 에르신 에르친 대사가 한 말입니다. 터키는 6·25전쟁 당시 참전국 중 네번째로 많은 2만 1500 명의 군인을 파병하여 966명이 숨지고 1,155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터키군이 중공군과 백병전을 치룬 ‘군우리 전투’는 한국과 터키를 ‘형제의 나라’로 묶어준 전투입니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들은 또 다시 항미원조를 강조하고 나서는 시주석의 연설이 한중관계에 격랑(激浪)을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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