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1951년 3월 서울 재수복
2023.03.15
오늘도 72년 전 1951년 3월의 6∙25 전쟁을 회상해 보겠습니다.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1월 4일 재차 서울을 빼앗긴 유엔군은 2월 동안 썬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 킬러 작전 등을 통해 다시 북진하지만 2월 11일 중공군의 제4차 공세와 맞닥뜨리면서 한국군 제8사단이 횡성에서 중공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합니다. 하지만 유엔군은 원주와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을 물리치면서 북진을 이어갔고 킬러 작전과 리퍼 작전을 통해 서울을 재수복합니다. 하지만 중공군은 재역전을 노리면서 4월 22일 제5차 공세를 개시합니다.
2월 21일에서 3월 6일까지 수행된 킬러 작전은 중공군이 보급과 전력 재편성에 어려움을 겪는 틈을 타서 중공군에게 빼앗겼던 횡성·평창 전선을 회복하는 것이 주 목표였지만 ‘킬러(killer)’라는 작전명이 의미하듯 공산군 병력을 최대한 소모시키는 것도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폭우와 폭설 속에 흙탕물과 싸우면서 전개된 이 작전을 통해 유엔군은 3월 4일 횡성을 탈환하고 양평-횡성-평창-강릉 선까지 전선을 끌어올리는데 성공합니다.
킬러 작전의 후속으로 3월 7일부터 펼쳐진 리퍼 작전은 ‘쇠톱(Ripper)’이라는 작전명이 말하듯 동서해안에서 상륙작전을 위협하면서 중동부 전선을 돌파하는 양동작전으로 공산군을 양분시키고 서울을 재탈환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즉 한국군 제1군단이 동부전선에서 북진하고 미 제9군단과 10군단이 중부에서 진격하는 동안 미 제1군단이 서울의 중공군을 압박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에 따라 미 24사단은 청평호, 국군 6사단은 홍천강 남쪽의 고지 그리고 미 기병사단은 춘천을 차례대로 점령했고, 미 25사단은 양평 양수리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을 압박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한국군 제1사단은 3월15일 한강을 건넜고 16일에는 미 제3사단과 함께 서울 전역을 장악했습니다. 중공군이 저항하지 않고 물러남에 따라 한국군은 1950년 9∙28 서울 수복때와는 달리 치열한 시가전 없이 150만 시민의 대부분이 피난을 떠나고 폐허로 변한 서울을 다시 장악합니다. 이로서 중공군의 제4차 공세는 무위로 끝납니다. 2월 11일에 개시된 중공군의 4차 공세는 가평∙홍천 일대의 유엔군과 한국군 2~3만 명을 섬멸하여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하고 37도선 이남, 대전-안동선까지 점령하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지만 중공군은 유엔군의 킬러 작전과 리퍼 작전에 밀려 서울을 다시 내주고 북쪽으로 물러나고 만 것입니다.
이 직후 전개된 문산 공수작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 제187 공정연대는 6∙25 전쟁을 통해 총 세 차례의 공중강습 작전을 펼쳤습니다. 인천상륙작전 다음날인 1950년 9월 16일 김포공항을 장악하기 위해 김포에 투하된 것이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1950년 10월 20~21일 북쪽으로 패주하던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평양 동북쪽 숙천∙순천 지역에 투하된 것이었습니다. 유엔군이 서울을 재수복하고 북진하던 1951년 3월 23일에 실시된 문산 공수작전이 세 번째였는데, 목적은 의정부 북쪽에 주둔한 중공군 제26군과 북한군 제1군단의 퇴로를 차단하여 서울을 지나 북진 중인 한국군 1사단, 미 3사단, 미 25사단 등과 합동으로 이들을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전용사들은 135대의 수송기들이 대구에서 한 달 동안 훈련받은 187 공정연대 장병들을 태우고 문산 일대를 뒤덮었던 당시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 주력부대가 한발 앞서 임진강을 건너 후퇴하는 바람에 목표했던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고 1개 연대의 적군을 생포하거나 사살하는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 무렵 미군과 한국군에 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미 제9군단장 브라이언트 무어(Bryant Moore) 소장이 킬러 작전이 한창이던 2월 24일 헬기 추락으로 전사했고, 리퍼 작전이 끝날 무렵이던 3월 28일에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피난민 10만 명을 함께 철수시킨 김백일 제1군단장이 역시 헬기 추락사고로 전사했습니다. 한국군이 노동당 제2비서이자 대남 유격대 총사령관인 북한군 길원팔 중장을 생포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북한 후방에 침투하여 활동 중이던 한국군 백골병단이 3월 18일 길원팔과 부하들을 설악산 필례마을에서 생포하여 암호, 난수표, 조직편성 등 기밀문서들을 노획한 것입니다.
이렇듯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3월 24일 동부전선에서 한국군이 두 번째로 38선을 넘었고 3월 27일에는 양양을 점령합니다. 서부전선에서도 유엔군이 4월 2일 다시 38선을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전쟁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중공군이 4월 22일 제5차 공세에 들어가면서 한국군 제6사단이 화천군 사창리에서 처절한 패배를 당하게 되고 유엔군이 핵무기 사용, 중공 해안봉쇄와 중공 본토 공격 등 확전을 심각하게 검토하면서 동시에 철군계획도 함께 세웠던 것이 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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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